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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사랑한나무

내가 먹는 항암보조제

라이프케어 김동우 2014. 12. 5. 20:39

하기 내용은 자향님이 투병 과정에서 작성한 글 이며 현재 암과 투병중인 환우님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개 합니다. 자향님은 8년간의 긴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4년 12월5일 4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부디 아픔 없는 세상에서 영면하시길 기원 드립니다/김동우

 

 

 

 

내가 먹는 항암보조제

 

 

 

 

요즘 내가 복용하는 항암건강보조제이다.

하병근박사님이 권하는

비타민C

비타민D3

코큐텐,

셀레늄

알파리포산

파마낙 에 더하여

 

 

스트론티움 ( 뼈전이에 효과적)

비타민E

오메가3

달맞이꽃종자유포씨추출물

멀티비타민

비타민B3(니아신)

 

밥보다 더 많기도 하지만 검사결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것 같아 

정말이지 열심히 챙겨먹고 있는데

요즘 우울증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타민B3 덕분인것 같다.

비타민B3가 정신분열증, 우울증에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한다

직접 먹어보고 체험해봤으니  내 몸이 마루타인 셈이다

 

 

 

 

 

미슬토주사후 무기력증

 

7월 23일부터 미슬토주사를 시작하여 현재 2mg에 들어갔다.용량이 높아져서 그런지 발적도 심하고 가려움도 심하지만 자꾸 눕고 싶고  무기력증이 와서 근무하기가 힘이 든다.하반기 약품품의를 해야 하는데  자꾸 미룬다.미슬토주사주의사항을 보면 발적과 무기력은 긍정적인 반응이라 되어있어 안심을 한다.

 

재발된지 2년 2개월이 되었다.

전이가 온 몸으로 상승곡선을 타다가 작년 6월 방사선, 항암을 시작으로 줄기세포를 같이 병행한 결과 CA15-3수치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오고 군데 군데 남아있는 암세포들도 힘을 못쓰는게 느껴진다.얼마전부터 줄기세포에 면역세포주사까지 미슬토까지 아마 암세포들이 정신을 못차리지 싶다.

 

9월 6일 동남권원자력병원에 예약이 되어있다.

항암 탁솔을 17차까지 하고  더이상 견딜수없어하자 호르몬 치료를 하자고 한다.면역치료만 계속하고 싶지만 작년에 워낙 고생을 해서 의사샘말도 착실히 듣고 싶다.

 

배주위가 근질거리고 체온도 상승된것 같다.완치는 어렵고 수명연장만 할뿐이라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나는 미슬토주사를 직접 놓고 줄기세포와 면역세포를 맞으러 비행기를 탄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

 

언젠가 우리가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덪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생에서

큰 결정과 선택을 할때 유용한 도구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은 (모든 외부의 기대, 모든 으스댐, 모든 창피와 실패의 두려움 등)

죽음의 얼굴앞에서 다 떨어져 나가고 오로지 진실로

내게 중요한 것만 남을것이기 때문이다.

                                                       - 스티브 잡스-

 

 

 

2010년 6월 폐와 뼈로 전이가 시작되면서 죽음은 내게 있어 가장 큰 화두였다.

사실 처음엔 죽음따윈 두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죽음으로 인해 아직 어린 초등학생 두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누군보다 열심히 투병생활을 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2011년 전이가 더 많이 진행되면서 찾아온 가공할 만한 통증은

내게 가장 소중했던 엄마로서의 존재감, 삶의 의지, 희망 따윈 내동댕이쳐 버리고

그냥 내 육신을 부숴버리고 싶었고, 내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너무너무 고통스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싫었고,

누울 수도 없었고

잘 수도 없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도 없었다.

 

하루 24시간중 24시간을 통증에 시달렸다.

그래도 항암이 하기 싫어 병원엘 가지 않았다.

 

2006년 유방암 수술직후 항암을 하면서

내 육신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었고

내 영혼이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고약한 느낌을  받아서 항암에 대한 거부감이 누구보다 싫었다.

 

그래도 통증을 견딜수가 없어 결국은 2011년 5월 병원에 가게 되고

병원에 가게 되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항암을 시작하게 되었다.

탁솔이라는 항암제는 탈모는 물론 구토와 설사, 말초신경저림 등을 유발시켰다.

탁솔을 17사이클을 했으니 어지간히 한 셈이다.

다행히 중간중간 줄기세포주사라는 면역증강주사를 일본과 중국을 왔다갔다하며 맞았었다.

그래서인지 탁솔의 내성이 빨리 생기지 않아 17번이나 맞을 수있었던것 같다.

줄기세포주사는 항암제의 부작용도 많이 줄여주었고 기력도 많이 처지지 않아 복직하여 근무까지 하면서

항암과 줄기세포를 맞았다.

 

그러나 줄기세포는 여러가지 한계가 있었다.

 

통증으로 너무나도 견딜수 없을때

체력은 바닥나고 항암할 자신도 더군다나 없을때 

커다란 희망처럼 느껴져 거액의 줄기세포 치료비를 위해 집까지 대출받아 시작한

줄기세포를 항암제와 병용을 하자 처음엔 암세포가 줄어들어

나을 수있다는  희망이 보여 더 많은 비용을 감수하며

수십차례 받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다시 암세포가 늘어나고, 빚도 늘어나고....

처음 전이진단을 받았을때보다 더 사면초가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탁솔 부작용 하나인 발바닥저림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해져

나중에 내 발바닥 가죽을 도려내고 싶을 만큼 저리고 가려웠다.

부작용 방지약이라고 주는 약들은 항전간제, 즉 간질약이었다.

 

2013년 2월은 전이된 2010년 6월보다 더 비참하고 더 괴로웠다.

그나마 희망이었던 줄기세포도 더이상 할 여력이 없었고, 암은 더 극성을 부리고,

줄기세포 치료비로 인한 빚은 늘어 감당하기 힘든 상태까지 왔고,

이젠 몸과 함께 마음의 병까지 와 너무 지치고 힘이 들었다.

 

극심한 우울증과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도로 왔다.

 

무서웠다.......

 

밤에는 저승사자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고

그 무엇보다 아무것도 할수없는 무기력상태가 너무 힘들었다.

소중한 아이들에게 짐이 되는것 같았다.

차라리 이럴바엔 하루라도 빨리 죽는게 다른 사람에게나, 나에게도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인것 같았다.

 

그시점 병원에서는 탁솔에 대한 내성으로 호르몬치료를 시도했으나 그것도  실패하자

젤로다라는 경구용 항암제를 권하여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복용을 시작했다

그러나 복용을 하자마자 엄청한 고통에 시달렸다.

복용한 날부터 시작된 설사와 구역질.....

구역질이 끝없이 나오자 손가락 하나조차 까닥할 기력도 화장실에 갈 기운조차 없었고

모든 걸 아이들에게 의지해야 했다.

어느날 밤은 숨을 쉴 기력조차 없어 이대로 잠이 들면 죽겠구나 싶어 

아침에 아이들이 죽어있는 엄마를 발견할것 같아 옆에 유서를 써두기도 했었다. 

도와 줄 사람이 없어 사돈의 팔촌(?)까지 불러 응급실을 드나들며 링거를 받았다.

 

더이상  항암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결정 또한 정말 쉽지않았다.

자연요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이젠  항암마저 그만 두면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기에는 내가 너무나도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젠 죽음은 곧 닫쳐올 기정사실이나 정말 통증으로 몸부림치며 죽고 싶지 않았다.

항암제를 그만두고 싶다하자 의사선생님은 그럼 더이상 자신이 해줄것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그럼 통증이 오면 어떻하지???

 

내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건 통증이었다.

 

그러다  부산대학병원에 호스피스병동이 생겨 통증완화치료를 중점적으로 한다고 소식을 듣고

다니게 되면서 다행이 마약성진통제와 패치를 처방받을수 있게 되었고

많은 양의 마약성진통제와 패치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2014년 10월 현재 나는 어떤 진통제도 쓰지 않고 있다....

 

내게 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는 암성통증이다.

그래서 늘 어떻게 해야 잘 죽을지를 연구하였다.

통증으로 심할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도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고통스럽게 죽은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물론 너무나도 통증이 심할때는 아이들생각을 할수 조차 없었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사라지고만 싶었다.

 

 

 

언젠가 우리가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덪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생에서

큰 결정과 선택을 할때 유용한 도구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은 (모든 외부의 기대, 모든 으스댐, 모든 창피와 실패의 두려움 등)

죽음의 얼굴앞에서 다 떨어져 나가고 오로지 진실로

내게 중요한 것만 남을것이기 때문이다.

                                                       - 스티브 잡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고 알고는 있지만 일상의 삶속에서  인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좀 빠를 수도 있고 좀 늦어질수도 있다고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그것또한 인지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언젠가 우리가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덪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도

결국 죽음의 순간이 오면 누구나 담담할 순 없을것이다

 

죽음과 여러번 사투를 벌이며 살아온  나의 경험으로는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여러가지 고통들.....

- 통증, 인간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상적인 일을 할수없다는 무기력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작별 등- 

때문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너무나 무섭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의 화두는 웰다잉이 되었다.

 

잘 죽는 것,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것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가장 필요한 그리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항암제로서의 옻에 대한 나의 경험

 

 

2010년 5월

언니가 20여년을 알고 지내는 한 비구니 스님에게서 옻이 암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병에 200만원짜리를 질러 가지고 와서 옻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아직 전이판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워낙 많이 받는 상황 때문인지 몸이 영 좋질 않았고 자꾸 어딘가가 쑤시는 느낌이 들곤 해서 순순히 먹어보겠다고 하고 하루에 3잔씩 보약처럼 마셨다.

이 옻은 강원도의 한 노인이 알러지성분을 없애는 특수공법으로  개발해 꼭 필요한 환자에게만  직접 가공해 공급해 준다고 했다.

소주잔으로 백자항아리에 담겨진 옻을 한잔 마시면 신것도 아니고 쓴것도 아닌 아주 고약한 맛이 들어

마시고 나면 구역질이 나기도 하는 그래서인지 진짜 약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그후 2주후 뼈와 폐로 전이되었다는 판정을 받고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긴 했으나 

이 시기에 옻을 소개받았으니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옻의 성분에 대해 공부를 해보자

러가지 항암적 효능을 알게 되었고  옻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옻에는 ACM909의 항암성분, 천연항암제(HP오르시올)가 기존의 항암제의  65배이상 항암효과가 있다고 한다.

산림청 임목 육종 연구소에서는 옻나무에서 특수하게 처리하여 추출한 성분을 알수없는 5가지 복합성분체를 MU2라고 명명하고, 이물질은 항암효과가 매우 탁월하다고 한다. 

 

 

때마침 그즈음 국내 유명 한방대학병원 최모교수님이 옻으로 항암치료제를 개발해 화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어느 폐암 환자가 그 제재를 먹고 완치했다는 기사를 보고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복용했다

 

물론 옻의 항암효과를 믿는다고 그것에만 매달리지 않고 단식원에 가서 열흘간 단식하여 몸을 해독하고

자연대체요법에서 알아준다는 니시요법을 병행하였다.

학교는 확실한 투병을 위해 일년간 휴직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풍욕으로 시작해서 비가오나 눈이 오나 태종대를 매일 한두바퀴 걷고

태종대온천에 가서 니시요법에서 시키는 대로 냉온욕을 하고 생채식도 정말 열심히 했다.

더불어 집에서 도구를 사서 배꼽주변에 왕쑥뜸을 하고 하루 3잔씩 옻을 마셨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설마 낫겠지, 그럼 복직해서 다시 열심히 살아야지 ~~라는 생각은 3~4개월만에 찾아온 통증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옻을 거의 열병이상 복용했다.

옻값만 8백만원이상이 들었다.

그런데도 척추뼈로 전이된 암은 진행이 계속 되어 척추신경을 눌러 앉을수도 누울수도 없는 통증과 악액질로 거의 죽다시피 했다. 

그리고 처음엔 폐와 뼈 두군데의 전이가  옻 열병을 먹고 난 뒤에는 간까지 전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이후  OO면역세포를 맞고도 계속 암이 진행되바

OO면역세포 회사의 대표님이 주선해 서울OO한방병원에 옻성분의 약인 넥OO라는 약을 먹게되었을때도

이미 옻에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다지 신뢰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한병에 60만원을 호가하는 옻엑기스도 계속 먹자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는데

넥OO는 한달 처방에 480만원이 들어가니 한두달 먹어 낫는것도 아니고

처음엔 OO면역세포회사에서 약값을 대겠다고 해서 한달분을 처방받기는 했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비싼 약값을 계속 지원받아 투병하기에는 아무런 명분도 없을뿐 아니라, 계속 지원해줄것 같지도 않았다. 

전이암, 특히 뼈까지 전이된 암에는 제 아무리 옻이라도 좀 힘들다는 병원 관계자의 말도 수긍이 갔다.

더이상 옻에 대해 미련이 더이상 없었고

옻에 대해 신뢰감이 사라져 그 이후 옻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내게 옻을 처음 권한 스님은 그 옻으로 대장암을 완치했고

옻의 항암효과나  여러가지 임상실험, 넥OO개발 등에 솔깃해 확신을 가지고

옻으로 완치되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으며 완치기대를 한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옻을 필두로  한국에서 할수 있는 양방, 한방, 자연치료 등등 거의 모든 방법을 다 적용해 보았지만 

어떤 한 제재만 가지고 암을 이겨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아둔한 생각이었는지 이제사 겨우 알것 같다. 

 

 

NK 세포 배양 치료같은 면역 치료도 항암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런 치료가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시행중이고... 한번에 5백만원 정도고, 5회 한세트 치료시에는 2천만원이 약간 넘습니다)

대부분의  암 환자분들은  이 치료에 올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항암에는 절대 슈퍼맨이나 베트맨 같이 혼자 모든것을 해결하는 영웅은 없습니다. 

모든 여러 치료가 합쳐져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국내에서 받을수 있는 고가의 항암인  1억 짜리 양성자 치료도 그렇고, 일본에 가서 할수 있는  중립자 치료도  결국은 환자의 상태를 일시적으로 도와주는 한가지 요소일 뿐인데...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런 치료 하나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항암 치료에 필요한 자세는 단시간에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보다는,  장기간의 꾸준한 관리로 암을 관리한다는 자세로 임하십시오.  그래서 나온 얘기가 암의 동반자 이론, 암의 친구 이론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hsrangfm

 

여러가지 통합적인 방법으로 암치료에 매진하고 계시는 어느 현직 의사선생님의 위의 말처럼

암치료제에 슈퍼맨은 정말 없다는 걸 나는 옻을 시작으로 항암제 탁솔, OO세포주사. 비타민C메가도스요법, 쑥뜸, 복어, 비소 등 수없이 많은 양한방 및 자연치료제를 경험해 본 결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물론 한 제재를 선택했다고 한가지만 올인한 건 아니고 내 나름대로 여러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암이 진행되었던걸 보면 무엇이든지 자기와 인연맞는 것도 있고, 약을 소개해주는 사람도 인연이 맞는 사람도 있고, 성공할 때와 실패할 시간적인 때도 어느 정도 있지  않나 싶다.

 

류시화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다보면 이런말이 있다.
'이미 수백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는 일인 걸 내가 어쩌란 말인가'라고

 

 '내게 일어난 일이 이미 수천년전부터 정해져 있다' 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면

21세기 첨단과학문명의 시대에 덜 떨어진 나약한 운명론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인생의 고비고비에서, 또는 인간관계에서, 또 기나긴 투병생활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해본 나로서는 

모든것에는 때가 있고, 약도, 의사도,친구도 다 맞는 인연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나의 생이 겉으로는 많은 고통과 실패로 얼룩져 보이지만

 인간은 고통속에서 성장하고 시련과 고통속에서 영혼의 성장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내 영혼의 진화를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를 하기위해,

우리 영혼들이 최적의 경험을 위해,

내 영혼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 세상에 왔다 한다. 

 

내 영혼의 자발적 선택인 이번 생에 주어진 숙제를 열심히 하다가

때가 되면 이 지구별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수 있을 것 같다.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이다.

고통의 숨결 속에서 영혼은 발육된다.

-에센 바하-

 

각설하고...

우습게도 지금 우리집에는

그 비싸다는 옻 치료제인 넥OO, 옻엑기스, 복어알, 경구용 항암제 젤로다, 최근 알려진 비소제재, 독일산 젤OO겐, 스피루리나, 등등이 굴러 다니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옻의 항암효과에 대해 매도하거나 폄하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재야에서 자연항암치료제개발에 열심히 연구하시는 여러 의료 관계자분들에게 누가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어떤 한 치료제가  모든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듯, 뼈까지 전이된 상태에서 암치료제에 대해 지나친 신뢰를 한 개인의 경험임을 알려드립니다 -

 

 

 

우리집에 피냐스 게이지씨가 살고 있는 것 같다.

 

피냐스 게이지라는 사람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실존 인물로 미국이 한창 철도공사를 할때 철도일을 하던 유능하고 성실하며 친화력도 좋은 젊은이였다 한다.

워낙 성실하고 유능해 젊은 나이에 작업반장이 되어 일을 하던 도중

다이너마이트폭발사고로 쇠파이프가 머리를 뚫고 들어가 큰 뇌수술로 했으나 다행히 목슴을 건지고

현장에 다시 복귀한 피냐스 게이스는 예전의 성실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아닌

화를 매우 잘 내며 충동적이고, 지나가는 예쁜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뽀뽀를 하려 하는 등 아주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피냐스 게이지 사망후 그의 뇌를 연구한 과학자들은 사고 당시 쇠막대기가 피냐스의 전두엽을 뚫고 들어가

판단능력 상실, 무례함, 이성상실 등의 성격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소년기의 특징이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충동적이고 무례하고 판단능력이 상실되는 등

피냐스 게이지처럼 행동한다하여 피냐스 게이지의 뇌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나도 이 사실을 알기전까지 원래 사춘기니까 그러려니 하고 무작정 이해하려 했으나

이 시기의 아이들은 한창 전두엽이 확장 공사중이라 그 기능이 피냐스 게이지와 유사함을 알고 나니

한결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

우리집엔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학생이 두분이나 살고 있다.

 

딸아이는 중3인데 이젠 많이 성숙하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 오히려 내가 기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아이도  5~6학년부터 사춘기가 와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외모에 신경을 쓰며,

친구들과 다투고 동생에게 시비도 거는  등

2010년 6월 재발되어 투병중인 나와 자주 마찰을 빗기도 하였고

중학교 들어와서는 사소한 이유로 엉엉 울고 짜증을 내는 등 감정조절을 잘 못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조용히 사춘기를 넘어가는 중이라  정말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작년 2013년 11월 골반뼈로 전이가 되어 고관절의 극심한 통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닐 즈음,

딸아이 학교의 도덕선생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셨다.

너무 성실하고 이쁜 친구라 부모님께 이렇게 이쁜 제자를 주셔서 감사의 편지를 쓴다고...

가슴이 먹먹했다.

내 몸의 고통으로 거의 아이들 문제를 잊고 살다시피 했는데 

내 생각보다 아이가 참 잘 자라주고 있구나 싶어 참 고맙고 감사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다른 아이보다 지나치게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이 좀 안타깝다는 말씀에 

가슴한편이 살짝 저리기도 했다.

항상 불만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던 딸은 이제 참 자라주고  오히려 내 든든한 기둥역할을 하고 있다.

 

아들 아이는 이제 중1인데 요즘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누나와 자주 다투고, 삐지고 엄마에게 가끔 심통도 부리고, 무지 게을러지고

그러면서도  감정조절이 안되는 등 전형적인 사춘기 아이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며칠전 자기는 우리집에서 왕따라고 울고 난 다음날

나는 퇴근후 아이의 감정을 받아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전화가 와 좀 심각한 어조로 아이가 좀 다쳤다 한다.

순간 선생님의 심각한 목소리에 가슴이 좀 떨리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바로 병원에 간 정도가 아니라면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평정을 찾고 아이를 기다렸다.

 

돌아온 아이는 양쪽 팔을 다 못쓰겠다고 해 시간이 늦어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로 가서 X-ray를 찍은 의사는 골절은 아니고 염좌인것 같으나 양 손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입원을 시키자고 했지만

그 간병을 누가 하랴 싶어 스프린트만 하고 돌아오니 밤 8시가 넘어 기력이 너무 달렸다.

 

겨우 밥을 한숟갈 먹고 자고

다음날 토요일, 골절은 아니라 하는데도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여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게 빠를 것 같아 근처 한의원에 가서 피도 빼고 침도 맞히고 하니

내가 가지고 있는 체력을 다 소비한 것 같고 기력이 너무 달려

결국은 며칠전부터 목이 조금 따끔거리는 것이 감기로 발병되어 심한 두통과 콧물 등으로

토요일 ,일요일을 감기몸살로 시달렸다.

 

그런데  사춘기 전두업 공사중인 아들은 이렇게 해서는 학교도 못가겠다고 심통?을 부리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오른쪽, 왼쪽 다 쓸수없으니 밥도 못먹겠다, 약도 못먹겠다.......

 

진단은 염좌인데 행동이나 표정은 거의 골절 내지 절단환자처럼  군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고 녀석의 감정을 복돋아주며 격려를 했지만.....

내 감정도 자꾸 우울모드로 들어간다.

아마 감기로 기력이 떨어지니 얼른 먹을거라도 제대로 먹어야겠다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것저것 챙겨먹이고 나도 먹고

나름 지혜롭게 아이를 컨트롤했다 싶어 뿌듯했는데 

월요일 아침 식사 겨우 하더니 교복을 다 입고는

속도 울렁거리고 팔도 아프니 학교를 못가겠다고 한다. 이런 된장할~~~

 

우리집은 딸 네명에 아들 하나라 친정어머니께서 막내 아들을 엄청 끼셨다.

나는 네번째 딸이라  동생에게 쏠린 어머니의 사랑을  보며 질투를 하고 자랐고

내가 보기엔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동생을 오히려 심약하게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주변에 사랑을 너무 받아 나약하게 큰

이 나라의 많은 아들들이 살아가며 많은 시행착오와 의지부족으로  인생을 거르치는걸 보고 

나는 정말이지 아이를 응석받이로 만들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다.

 

아이들 아빠는 천성이 착하고 감성적인 사람이라 처음엔 그 부분에 많은 점수를 주었다.

내 아이들의 친할머니는 지금 팔순의 나이니 그 시대에 3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그런지

자녀들을 놓으면 달아날까, 불면 날아갈까

노심초사 자녀들을 거의 본인의 생각속에서 위험하다 싶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하셨단다.

그런데 본인이 생각하는  위험의 척도가 보통 사람보다 너무 크고 많다 보니

자녀들의  활동범위와 사고의 폭이 참 좁고  제한되어 보였지만 본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례로 아이들 아빠가 성격이 좀 급하다보니 운전을 하지말라는 어머니의 엄명에 결혼하도록 운전면허증이 없었고

아이를 낳고 내가 운전을 해도 본인은 뒤에 앉아 아이만 보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아이가 차안에서 젖달라고 울면 잠깐 세워 젖을 먹이고 다시 아빠가 아이를 보고....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어 불편한데도 상황을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처음엔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인정하려던 나도 조금씩 불편해졌다.

 

어머니의 교육으로  인해 매사에 수동적이고 크고 작은 선택사항들에 쉽사리 결정을 못하며

누군가가 지시해주기를 기다리는 듯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작은 변화조차 힘들어하고 거부했었다.

 

실제로 아이들 할머니는

처음 결혼을 하자  무엇이던지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 이상없이 살수 있으니

나에게 본인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당부하셨다.

 

TV를 보시다가 뉴스에 감기가 돌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전화하시고,

비가 오면 오늘 출근할때 차를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고,

옷은 이런(?)옷은 입지 말라고 하고 쇼핑을 가서도 당신의 취향대로 골라주며 거부할 틈을 주지 않았고  

아이를 낳자 그 수위는 더 심해져

침대에서 아이가 떨어져 사고가 난 기사를 보면 침대를 버리라고 하시고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다친 기사가 나면 어린이집에 보내지 말라고 하시고

홍역 등 유행성 질병이 돌면 바깥출입금지는 기본이고

매일매일 뉴스를 보며 세상돌아가는 걸 보지 않는다고 답답해 하셨다.

이 세상은 그분에게 있어

도둑과 사기꾼이 판치는 무법천지 내지는 사자나 하이애나가 사는 아주 위험한 정글인듯 느껴졌다. 

누구도, 아무것도 못믿고 모든것에 대해 극도의 위험과 위기상황만을 항상 강조하며 조심하라 하셨다.

 

나는  늘 숨이 막혔었다.

 

그런데 2006년 암이 걸렸다.

4년후 전이가 되어 몇년간을 필사적으로 통증과 싸우고, 죽음과 싸우며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매사에 낙천적인 나도 건강에 대해서만은 아주 예민하게 되어

모든 생활의 우선순위가 건강, 건강이었다.

 

그래서 얼마전 아들이 열이 나고 아프자 학교를 하루 보내지 않았더니 

아니 이 아드님이 그게 아주 깊이 인식이 되었는지

그저 팔만 조금 불편할 뿐인데 학교를 가지 않겠다 한다~~~

집에 있으면 밥도 안먹고 하루종일 잠자고 게임할 거면서....(이런 나쁜 놈~^^)

 

생각해보니 아들들을 나약하게 키운다고 비난하던 나도 어느 순간 아이를 나약하게 키우고 있지 않나 반성이 들기도 한다.

 

일단 학교에 가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오후에 다시 병원에 가서 정형외과선생님께 확실히 타박상임을 확인시키고 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뉬다.

 

우리집 가훈이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엄마없어도 잘 살기, 독립투사 등

아이들에게 엄마없어도 살 수있는 자립정신을 키워주려 했는데

씩씩한 누나의 활약과 그나마 최근  엄마의 상태가 조금 좋아지면서

아들의 의존심이 자라면서 우리집에서 무임승차하려는 것 같다고  하자 본인도 순순히 인정한다. 

하지만 자기도 집안일을 잘 할 수 있고 조금 늦어도 자기가 할 마음이 있었으나 누나와 엄마가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다.

그랬나???

딸아이가 워낙  야무지고 믿음직하니 나도 모르게 딸아이에게 내가 의존한 것 같다.

 

아~, 이렇게 또 한치 자라는 구나 싶다.

 

어제 방송에서 본 다중지능검사를 소개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21세기는 인지적 측면만 고려한 IQ검사는 개인의 행복이나 인생의 성공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다중지능검사- 신체, 음악, 언어, 수학논리, 공간, 자연친화,자기성찰 등-중에서도

다른 부분이 조금 떨어지는 상황이라도 자기성찰지능이 높은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수있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기성찰지능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항상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자신을 알아차리는 부분이 부족하다 보니

실수와 시행착오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겪었음을 이제사 알것 같다.

 

이제 암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아이들을 좀더 당당하게 키우고 싶다.

 

엄마가 암환자이니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둥지속의 새로 키우려하지 말고, 자신감있게 인생을 살수 있도록

비록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그것들이 아이들에게 자양분이 되어  그네들의 인생이 좀더 풍요롭웠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