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치료 누구로부터 강요된 희망일까
모 대학에서 강의 중 들었던 유방암 환자와 가족에 관한 일화가 있다. 부부는 기독교 신자였고 금슬이 좋았다. 아내는 유방암으로 장기간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남편의 정성스런 간병 덕에 작은 욕창 하나 없었다. 그러던 도중 어찌된 영문인지 부인이 남편에게 화를 내며 병원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알고 보니 남편은 부인이 종교의 힘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길 바랬던 것이다. 혹독한 고통을 겪은 성인처럼 통증도 참아내고,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도 맞이하길 원한 것이다.
반면 환자는 죽음을 피하며 가족과 더 오랜 시간 같이 있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인간으로 대해주길 원했다. 그러다 보니 이상적인 종교 생활을 원하는 남편과 사이가 나빠졌다. 심지어 '종교가 내 남편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절대자를 원망하게 되었다. 부인이 어떻게 삶을 마무리했는지는 모른다. 환자 입장에서는, 제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하더라도 원하지 않는 신념을 강요받는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극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분노와 죄책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남긴다.
종교와 다른 '강요된 희망'도 있다. 벌써 수 년이 지났지만 필자가 치료했던 두경부암 환자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유달리 진행이 빠르고 수 차례 치료에도 악화되는 중년 남성이었다. 열심히 간병에 임했던 부인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병을 고치겠다는 신념이 대단했으나, 암은 이미 온몸으로 펴져 있었다. 건강상태도 매우 좋지 않아 항암치료도 위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치료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달나라도 가는 세상에 치료가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환자에게 따로 본인의 의사를 물을 기회가 있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는 눈물을 쏟아냈다.
“사실은 제 상태가 나쁘다고 알고 있는데 애 엄마를 위해서 치료를 받는 겁니다.”
환자는 치료를 원치 않는데도 가족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힘든 치료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극단적인 예는 드물지만, 환자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강요된 희망'은 흔히 볼 수 있다.
'나쁜 소식을 들으면 환자가 정말로 악화될 수 있으니, 이제부터 좋은 말만 해 주자'
'꼭 좋아진다는 희망을 가져야 완치될 것이다'
얼핏 들으면 바람직해 보이지만 매우 조심해야 할 생각이다. 희망을 강요한다면 환자가 원하는 바를 간과하기 쉽다. 예를 들어 '나쁜 소식'을 피하고 싶을 것이라는 가족들의 믿음과 달리 환자는 사실을 그대로 알고 싶어한다.
우리가 환자를 위해 돌보거나 치료할 때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무엇보다 환자 스스로 판단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암환자는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혼자 병원을 오기도 쉽지 않으며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남들과 똑같이 직장을 다니기도 힘들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면 자녀에게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상황이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대변보기, 소변보기 같은 기본적인 행동마저 스스로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가족에게 짐이 되고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육체의 병보다 더 괴롭다.
따라서 정말로 환자를 위한다면 의견을 존중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생사와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보호자가 돌보고 있는 사람은 환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짊어지고 있는 당사자이다. 비록 아무리 나쁜 소식이라도 그가 원한다면 알려줘야 하고, 아무리 좋은 신념일지라도 수긍하지 않는다면 권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주도 피조물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순종여부를 선택하도록 했다. 우리가 어떻게 삶의 방식을 선택할 기회를 환자에게서 빼앗을 수 있겠는가?
△ 작성: 나임일(원자력병원 혈액종양내과 과장)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수련을 마쳤다. 단순히 암을 치료하기보다 환자와 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올바른 치료방법의 선택을 돕는 조력자를 꿈꾼다. 2012년 한국임상암학회 보령학술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제 가족이 암이래요>가 있다. 현재,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교육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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