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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곤 에너지

라이프케어 김동우 2017. 8. 25. 15:50


ORGONE BIOMAT  






오르곤 에너지, 빌헬름 라이히 기의 과학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3.24 ? 1957.11.3)는 오스트리아의 성과학자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미국 FDA(美 식품의약청)로 부터 無허가 의료행위로 고소당하여 펜실베이니아의 감옥에서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글에서 소개하는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곤 에너지는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 1897-1957)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통합을 시도했던 좌파경향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것은 라이히의 연구와 사상적 업적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해이다. 젊은 날 독일 사회당에 가입하였으며 동시에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수제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당으로부터 제명당하였을 뿐 아니라, 스승인 프로이트로부터 파문당하다시피한 원인과 또 그 이후, 독일 나치로부터 박해받아 남은 여생을 외국망명생활로 보내게 된 라이히를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로 되어있다.

1934년에 독일을 떠나 노르웨이에 잠시 망명하였고 또 다시 1939년에 미국으로 영구망명하여 18년 후 1957년에 미국 펜실바니아주의 루이스파크에 있는 연방형무소에서 심장발작으로 옥사하기까지 20년 넘는 세월을 라이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이 기간 동안 라이히가 정립한 <오르곤 에너지>개념과 연구결과들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오히려 라이히를 불우한 천재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피해의식과 과대망상의 조짐이 보인다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역평가할 뿐이었다.

그나마 <초기에 정신분석학에 대한 라이히의 통찰력은 놀라운 바가 있었다>라는 평가가 라이히에 대한 정설로 굳어뎠으며 그 이후의 나머지 업적들은 <미국에서나 가능한 소위 신비주의와 유사과학의 기묘한 아말감>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뿐이었을까?

라이히는 왜 하필이면 감옥에서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을까? 게다가 미국정부(미국 식품위생국:FDA)는 라이히가 감옥에 수감된 동안에 남긴 방대한 저작물과 연구결과들을 가능한 모두 수거하여 소각하려 했다.

미국법정에서 최종적으로 그에게 언도된 죄목은 법정모독죄였다. 제판과정 중에서 라이히는 소위 법정이 그의 과학적 연구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광기(狂氣)에 기까운 행동 때문에 그를 비웃는 것은 아주쉽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그가 주장하고 지키고자 하였던 그의 연구는 어떤 것이 었을까?

오랜 생물학적인 관찰과 임상실험 등을 통하여 라이히는 소위 생명에너지라는 미지의 에너지를 발견한다. 그는 오르곤에너지라고 명명하였으며, 오르곤에너지라는 개념은 그 이후 라이히의 제반연구를 관통하는 핵심내용이 된다.

라이히에 의하면, 인간의 성적인 욕망과 오르가슴과 같은 성적 황홀상태는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리비도와 같은 심리적현상이 아니라, 오르곤에너지라는 생명에너지가 관련된 생명 물리학적인 현상에 오히려 가까운 것이다.

라이히는 이러한 오르곤에너지가 인간과 같은 생명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주공간에 이미 편재해있는 근원적인 에너지라는 것을 발견하여, 이어서 공간 상의 오르곤 에너지를 강하게 응집시킬 수 있는 오르곤에너지 집적장치를 개발한다.

이러한 발견 등을 통하여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심리학분야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생물학, 의학, 물리학, 기상학 등의 전체 자연과학을 포괄하는 오르고노미(Orgonomy)라는 새로운 학문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한다.

따라서 라이히는 일반에게 알려져있는 것처럼 심리학자라는 좁은 전문영역에 한정해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심리학, 생물학, 수학, 물리학, 기상학, 천문학, 그리고 천체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새로운 학문의 영역과 실제적인 <뉴 테크놀러지>를 개척한 창시자이다. 라이히 자신이 오르고노미(Orgonomy)라 호칭하였던 학문체계를 관통하는 핵심개념인 오르곤에너지란, 생체와 우주에 편재하는 미지의 유기적인 에너지를 말한다. 우주적인 생명에너지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의 정통 과학계는 이러한 미지 에너지의 존재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최근에 들어와서 진보적인 과학자그룹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는 신과학의 입장에서는 라이히가 주장하였던 오르곤에너지와 같은 미지의 공간에너지 그리고 생명에너지의 개념이 새로운 과학 패러다이믜 핵심개념으로서 정립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에 병행하여 라이히의 업적과 연구도 재평가되고 있으며 활발하게 연구가 재개되고 있다. 뉴욕 대학의 오르고노미 코스를 비롯해 오르고노미파라고 부를 수 있을 신진과학자와 의사들의 세미나가 미국에서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 아마도 21세기에 새로운 신과학 패러다임과 신기술들이 현재의 과학기술을 전반적으로 대체하고 나면, 필히 라이히는 20세기 최대의 과학자 중 한사람으로서 복권될 것이다. 인간의 오르가즘 즉, 성적 에너지현상에서 UFO현상에 이르기까지 전문적이면서도 체계적이며 통일적인 거대한 통찰력을 보여준 과학자는 라이히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라이히의 후반생의 연구가 급속하게 재평가되고 있다. 예를들면 캐나다의 요크대학 사회학교수 W.에드워드맨은 라이히의 연구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는 획기적인 라이히론인 {오르곤, 라이히,에로스}를 저술하고 있다.

또 1967년에는 신 라이히주의자들에 의한 기관지 <더 저널 오브 오르고노미>가 발행되었으며 1980년 5월까지 14호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최근 아메리카에서 증가하는 정신 신체요법의 여러 그룹에서도(예를 들면 에사렌연구소, 카이로스연구소, 바이오 에너제틱 분석연구소, 오르곤연구소 등) 신라이히주의의 영향은 지대하다.

-프로이트학파 정신분석학자에서 자연과학자로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자연과학자들 중 하나로 손꼽힐 수 있었던 빌헬름 라이히는 1897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았다. 1922년 25세 나이로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이 시기에 그당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수제자로 활동하였다. 당시 프로이트는 비엔나 정신분석학클럽을 주제하고 있었는데 이 모임의 핵심멤버였던 칼융과 빌헬름 라이히 등이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히는 점차 그의 스승인 프로이트의 학설에 이견을 느끼고 결국 이 모임에서 탈퇴한다.


1935년 라이히는 독일 나치정권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오슬로대학 심리학연구소에 어렵게 정착하게 된다. 1939년 미국으로 다시 망명하기까지 이 몇년의 연구시절 동안 라이히는 처음으로 미지의 생명에너지 존재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포착하게 된다.

당시에 라이히는 성적인 행위 속에는 심리적 요인뿐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적 현상이 더욱 지배적으로 작용한다고 단정짓고 있었다. 따라서 성적 오르가슴에 대한 연구방법도 정신분석학방법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자연과학적인 실험방법을 도입하였다. 전기에너지를 과학자들이 실험하고 측정하듯이 오르가슴을 발생시키는 성적 에너지 현상이 존재한다면 이것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전기에너지를 측정할 때에 사용하는 오실로스코프 장치를 이용한 여러가지 실험과 시도를 통해 성적 흥분상태에서는 피부 전기저항이 현저하게 변화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측정해낼 수 있었다. 
오르가즘 성에너지를 관찰하던 중 오르곤 에너지 발견 

분명히 성적 행위 속에는 소위 생명전기라고 불러야할 것 같은 전기적 에너지현상이 함께 발현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생명전기는 일반적인 전기개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독특한 패턴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전기저항이 높다 하여도 기본적으로 전기가 전달하는 속도는 거의 광속에 가깝다. 하지만 이 생명전기는 일초에 수mm 정도라는 아주 느린 속도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일반 전기의 에너지현상과는 거의 동떨어지는 현상들이 눈에 띄었다. 이로부터 라이히는 여기에는 지금까지 과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미지의 에너지는 성적 행위뿐 아니라 생명 현상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힘의 실제적인 근원일 것이다. 이 미지의 에너지를 나중에 라이히는 오르곤(Orgone)이라고 정식으로 명명한다.

라이히는 노르웨이 오슬로시절 동안, 생명의 기본적인 성질을 에너지적으로 확인하려는 방향으로 연구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초적 생명에너지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졌다. 오실로스코프 장치를 이용한 피부 전위변화 측정 등을 통해서 생명체에서는 전기에너지와 유사한 에너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실험적으로 확인하였던 라이히는, 이 에너지가 근원적으로 발생하고 또 전달되는 실제 메카니즘을 알아보기 위해 생물체 세포단위에서 관찰과 실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실험에 필요한 고배율의 현미경장치와 사진기 등을 친구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구입하였는데, 1936년 그 당시만 해도 생물 원형질체(Protozoa)를 현미경으로 자세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생명체의 기원, 바이온 소포체 발견 
실제로 그는 현미경을 통하여 생물체 세포 내 조직 관찰실험을 행하던 도중에 무언가 가장 기본적인 생명에너지 단위체라고 볼 수 있을 어떤 미지의 소포체를 발견하였고, 이것을 바이온(Bion)이라고 명명한다. 그가 발견한 바이온이란, 아메바와 같은 최소단위의 생물체와 무기물질과 같은 무생물체 사이에 과도적 단계에 놓여있는 생명의 기원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어떤 소포체를 일컫는 것이다.

어느날 라이히는 생물체의 조직세포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시험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건조시킨 이끼나 풀 등의 유기물들을 고온에서 열처리하여 살균시킨 뒤에 그 조직배양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조직배양액 속에서 이상한 형태의 자그마한 소포(Vesicle)들이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유기물의 본체로부터 떨어지려 하고 있었으며 마치 자그마한 원생동물처럼 스스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포(小胞)들이 상당수 모여들어 막에 쌓이더니 이제는 진짜 원생동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욱 정밀한 실험에서도 계속 똑같은 현상이 관찰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유기물질의 조직배양액에서가 아닌, 바다모래와 같은 무기물질에서도 똑같은 소포들이 관찰되었던 것이다. 1939년에 라이히는 태양광에 의해 달구어져서 뜨거워져있는 바다모래를 채취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현미경의 배율을 2,000-4,000배 정도로 맞추었을 때 푸르스름한 빛을 방사하는 똑같은 소포들이 관찰되었다. 라이히는 이것을 샌드파켓트 바이온(SAPA bion)이라고 명명하였다.

크기가 1미크론 정도인 이 소포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 소포체는 청백 또는 청회색의 연한 빛을 방사하며 불규칙적으로 맥동하였다. 게다가 여기에 생물염색액을 부어주면 격렬하게 반응하였기 때문에 새물체적인 활동성을 지니고 있음이 파악되었다. 라이히는 이것이 비생물체로부터 생물체로의 과도적 단계에 있는 생명의 실제적인 원인체라고 판단하였으며 따라서 이름을 바이온이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기존의 과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라이히의 바이온에 대하여 지극히 냉담한 자세를 견지한다. 라이히가 관찰하였던 것은 단순히 어떤 무기물질의 브라운운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히와 그의 계승자 그룹은 이같은 안이한 해석을 단호히 거절한다. 이 새로운 소포체의 운동은 대단히 규칙적이고 또 소포체 내부의 맥동까지 관찰되고 있으므로 무기물질의 브라운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라이히는 브라운운동과 생물체의 자발적 운동형태의 구별조차 못한다고 당시 과학계를 거꾸로 비판하였으며, 결국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라이히는 바다모래에서 발견된 바이온을 매일같이 현미경으로 관찰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눈 주위가 마치 강렬한 태양광에 그슬린 것처럼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바이온 배양액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있어보니 무언가 가려운 느낌이 전달되었다. 바이온에서부터 어떤 미지의 기묘한 방사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었다. SAPA 바이온 배양액 근처에 놓인 고무장갑을 검전기에 대자 강한 반응이 일어났다. 또 목화와 셀루로이스 재료로 시험해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바이온 그 자체는 검전기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야간이나 어두운 곳에서 SAPA 바이온을 관찰하자 푸르스름한 안개같은 빛이 은은히 방사되어 나오는 것이 확연히 관찰되었다. 바이온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이 미지의 에너지를 라이히는 <오르곤>이라 명명하였다. 얼마 후에 라이히는, 밀도는 서로 다르지만 오르곤에너지는 도처에 편재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라이히는 오르곤에너지를 모아 집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SAPA 바이온배양을 연구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였다. 그는 프레스합판 상자를 만들어 내부에 철판을 대고 그 속에서 바이온을 배양하였다. 배양상자의 내부를 금속으로, 외부를 목제와 같은 유기물로 만들면 오르곤에너지가 외부로 방사되어 유출되는 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기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바이온배양액을 꺼내어놓고 금속벽을 청소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 금속 주위로부터 푸른빛 방사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상자는 혹시 오르곤을 외부에서 끓어당겨 집적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그는 새로운 상자를 만들어 바이온배양액을 전혀 넣어두지 않은 채 그냥 놓아두어 보았다. 그 결과는 역시 생각한 대로였다. 나중에 그는 이 상자를 오르곤집적기(Orgone Accumulator)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 오르곤 집적상자는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오르곤을 집적하는 것일까...
-오르곤에너지 발견

1939년 라이히는 미국으로 망명한다. 라이히 이론에 대한 유럽의 정신분석학자와 매스컴에서 비난의 강도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 정신의학교실에서 강의하고 있던 데오도르.P.월프박사의 간곡한 권유로 라이히는 신천지 미국으로 이주할 결심을 한 것이다.
1940년 라이히는 미국에서 맞는 첫번째 여름, 라이히는 휴가를 내서 미국의 메인주로 여행을 떠났다. 그날밤, 그는 근처의 호수에서 밤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쪽 지평선에는 달이 낮게 떠 있었고 반대편인 동쪽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천체 한가운데(天頂) 위치한 별들이 지평선 별들보다 빛이 약하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였다. 만약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별들의 반짝임이 대기에 의한 빛의 확산에 의한 것이라면 전체 하늘의 별들의 반짝임은 모두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순간 직관적으로 라이히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르곤에너지가 모든 공간에 편재해 있으며 그것이 별들을 반짝이게 하는 것!....라이히는 대기 속에도 오르곤에너지가 편재해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눈을 감고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어디에서인지 모르지만 청자색의 작은 빛들이 나타나서 주기적인 나선운동을 하면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떠도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캄캄한 방안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또 감은 눈자위를 손끝으로 부벼보면 이러한 섬광을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일반적으로 그냥 눈 안의 섬광으로 가볍게 취급되고 있는데 왜 그러한 현상이 생기는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는 바가 없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로 하얀 스크린이나 벽을 바라보자. 역시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조금 빠르게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것은 눈을 감았을 때 관찰할 수 있는 현상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눈을 창공으로 향한 채 지긋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한참 시간이 흐르면 파도같이 흔들리는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이러한 섬광과 흔들리는 빛은, 사실은 오르곤이 아닐까하고 라이히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 라이히는 내부를 무광택으로 검게 만든 금속통을 이용하여 이것을 눈에 대고 여기저기를 쳐다보았다. 그는 길이 30cm, 직경 5cm 정도 크기 금속통을 만들고 그 내부를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무광택의 검은색으로 칠하였다. 그리고 어느 맑은 저녁날 그는 실제로 금속통을 시험해 보았다.

대기 속에서 반짝임 같은 것이 한층 잘 보였다. 금속통을 통한 원형의 암청색 공간 속에 우선 흔들리는 빛이 나타나고 뒤이어 점모양과 선모양의 약한 빛이 보였다. 이 현상은 배경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 잘 보였다.

달빛 방향으로 금속통을 향하면 그 현상이 약해지고 별과 별 사이의 어두운 공간을 향하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지면이나 바위를 향해서 보더라도 그 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이 빛은 눈 안에서 나타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 실제로 대기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일까. 라이히는 이 점을 확실히 밝히기 위하여 금속통의 눈 대는 부분에 배율 약 5배 정도의 접안 렌즈를 끼워보았다.

그 결과 보이는 부분이 확대될 뿐 아니라 점모양과 선모양의 빛들도 함께 확대되어 보였다. 이 빛들이 만약 눈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접안렌즈를 댄다 하더라도 같은 크기로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런 연유로 라이히는 이것이 대기 중의 오르곤에너지에 의한 현상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금속통에 의한 오르곤 관찰은 계속 이어졌다. 안개낀 밤에는 빛이 극히 약하거나 또는 아예 관찰되지 않는 적도 있었다. 거꾸로 습도가 낮고 맑은 밤에는 빛이 가장 강렬해졌다. 마치 습기는 대기 중에서 오르곤 방사를 흡수해 버리는 것 같았다. 또 금속통을 지면쪽으로도 향해 보았다. 역시 섬광현상이 나타났으며 아스팔트보다는 흙쪽이 더 강했다. 식물에도 금속통을 대본 결과 잎이나 꽃 부분이 가장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오르곤 방사현상은 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거의 모든 곳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찰결과를 통해 라이히는 완전히 자신을 갖고 본격적으로 오르곤에너지 실험을 하기 위하여 이 에너지를 어떤 일정한 공간에 집적시키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오르곤 직접상자(Orgone Accumulator)로 병 치료.

대기의 광현상(오르곤)을 발견한 후, 라이히는 본격적으로 오르곤 에너지집적기 제작에 착수하였다. 그 기본적인 원리는 아래 두가지 기초적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1.유기물은 오르곤에너지를 끌어당겨 흡수한다.
2.금속(특히 철)은 오르곤에너지를 금속 표면에서 반사시킨다.
바이온 배양실험을 통해서 라이히는, 유기물은 오르곤에너지를 끌어당겨 흡수하려는 성질이 강한 반면에 금속물체는 오히려 끌어당긴 후에 다시 반사시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이미 관찰한 바 있었다. 이러한 실험결과들을 응용하여 라이히는 대기 중의 오르곤에너지를 집적시킬 수 있는 특수한 상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오르곤집적기(Orgon Accumulator)라고 명명된 이 상자의 기본적인 구조는 바깥쪽은 목재 혹은 프레스합판과 같은 유기물 재료를 사용하고 가운데는 면이나 그래스울과 같은 단열재를 대고 가장 안쪽으로는 철과 같은 금속판을 사용하되, 이러한 배열을 여러겹 이상으로 층층히 만든 것이다. 이같이 배열함으로써 대기 중의 오르곤 에너지가 상자 속으로 강하게 집중되어질 것이라고 라이히는 생각하였다.

이 상자는 어떻게 오르곤을 흡수하여 상자 내부에 오르곤에너지를 집적시키는 것일까. 오르곤에너지에 대한 성질이 서로 상이한 두가지 이상의 재료들이 한 방향성으로 배열되어 있으므로 오르곤에너지의 흐름도 역시 한 방향을 향하게 된다. 즉, 흡수성이 강한 유기물질 쪽에서 반사성이 강한 금속물체 쪽으로 오르곤에너지의 흐름이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오르곤 직접상자 내부에는 점차 오르곤에너지가 축적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수 겹의 재료들로 만들어진 오르곤집적상자는 그 내부에 오르곤에너지를 강하게 집적시켰으며, 이 장치를 통해 더욱 다양한 실험들이 행해질 수 있게 되었다. 집적 상자장치는 나중에 의료기기로 주로 사용되는데, 소형 전화박스 크기만한 오르곤 직접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 다양한 질병들이 치료되고 건강을 되찾는 결과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라이히는 1940년 12월에 최초의 인체용 오르곤 집적상자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집적상자는 공중전화 박스의 높이를 약간 낮춘 것같은 크기로서 상자 내부에는 좌석이 달려있어서 사람이 앉아 휴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상자의 소재는 외부 쪽은 나무 또는 합판으로 된 유기물 재료를 사용하며 내부 쪽으로는 철판이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라이히에 의하면, 금속재료로서는 철이 가장 좋으며 알루미늄은 의료목적으로 쓰기에는 부적합 것 같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보다 편리한 오르곤 집적기기로써 오르곤 집적매트와 오르곤 직접투사기 등이 이후 별도로 만들어졌다. 이들 기기들도 오르곤 집적상자와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치유효과가 있다고 말해진다. 라이히가 개발한 오르곤 집적상자를 이용해본 환자들은 암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병세가 훨씬 호전되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였다. 라이히 본인은 이 오르곤상자가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상업적으로 선전한 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법의 상자는 세간에 계속 소문이 퍼져나갔으며 이로부터 라이히의 명성이 은연중에 알려지긴 하였지만, 이는 결국 나중에 오히려 라이히의 발목을 붙잡는 사태를 초래하고 만다.

현재 지금도 미국의 드미오박사 같은 라이히 후계자들은 아직도 오르곤 집적상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병자들을 치료하고 있으며 그 임상결과들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치료용으로 오르곤 집적상자를 이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장치를 이용한 과학적인 실험들 중에서 몇가지 주목할 만한 측정결과들이 나타났다. 특히 오르곤 집적상자 내부에서는 윗부분 온도가 아랫부분 온도나 상자 바깥 대기온도보다 항상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상자 속 같은 공간에서 온도차가 항상 유지된다는 것은 물리학의 기본원칙인 열역학 제 2법칙에 모순되는 것이다. 라이히는 이 결과가 지니는 중요성을 직감하였다.

그는 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하여 먼저 벽면을 30cm 정도로 작은 오르곤 직접상자를 만들고 또 비교용으로 똑같은 크기의 목재상자를 만들어 실험해 보았다. 실험결과, 오르곤 집적상자는 항상 내부의 위쪽이 더 높은 온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온도차이는 실험할 때의 기상상태에 따라서도 미묘하게 변화하였다. 빛이 밝고 건조한 날에는 온도차가 2도 정도로 크게 나타냈지만, 습도가 많은 날이나 비오는 날에는 온도 차이가 0.2도 정도로 거의 차이가 없어졌다. 또 온도차는 외부환경에 의해서도 여러가지로 변화하였다. 아침 무렵에는 불과 0.2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오후 2-3시경에는 1-1.5도 정도로 차이가 커졌으며 해질무렵에는 1도 이하로 다시 떨어졌다.

또한 직접상자를 땅속에 묻었을 경우에는 온도차가 5-10도로 상당히 컸다. 특히 비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해가 뜨는 건조한 날과 비교해서 온도차가 훨씬 적었으며 많아도 0.3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같은 날에는 대기 중의 오르곤 방사현상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함께 확인되어서, 이로부터 라이히는 물이 오르곤과 특별한 친화관계에 있음을 직감하고 이후의 인공강우 실험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만남

미국에 거주한지 2년째인 1941년 1월,라이히는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머물고있던 아인슈타인을 방문하였다. 앱튼 싱클레어의 텔레파시연구 등 이단적인 연구가들에게도 관대했으며 과거 지지성명까지 발표한 아인슈타인이라면 연구를 인정하고 도와주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라이히는 서재에서 아인슈타인과 한참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후에 가자고간 올고노스코프 장치를 꺼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르고노스코프(Orgonoscope)란 라이히가 대기 중에서 오르곤을 관찰할 때 사용하였던 렌즈 달린 금속통을 보다 세련되게 개량한 것을 말한다.

서재의 전등을 끄고 어두운 상태에서 오르고노스코프를 건내주며 들여다보도록 아인슈타인에게 권하였다. 20여분 정도 아인슈타인은 이 장치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경탄의 목소리를 토하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은 오르고노스코프를 통하여 공기 중에서 마치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듯한 섬광현상을 목격한 것이다.

다시 전등불을 밝히고 나서 라이히는 오르곤에너지를 집적시키는 오르곤 직접상자에 대하여 소개하였고 특히 직접상자 내부의 온도차이에 대해서 그리고 열역학 제2법칙에 맞자 않는 이 현상이 발생한 것에 대하여 실험 데이터기록을 보여가며 설명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대단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5시간 동안의 회담을 끝내고 돌아서는 길에 아인슈타인은 라이히에게 자신이 오르곤 집적상자 속의 온도차이 실험을 확인해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조수에게 온도차 실험의 확인을 지시하였으나, 이 조수가 데이터를 자세히 검토하지 않고 단순히 차가운 공기는 밑으로 깔리고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소위 대류현상에 의거한 일반적인 사실에 불과한 것 같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더이상 라이히를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또는 애당초 아인슈타인은 열역학 제2법칙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라이히의 주장을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여하간 그 이후로 라이히는 아인슈타인에게 수차레의 편지를 보내었지만 단 한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 이후 라이히는 미국 내에서 후원자를 구하는 것을 단념하고 스스로 홍보하기로 결심한다. 다음해 그는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메인주에 토지를 구입하여 독자적인 연구센타 건립을 추진해나간다.

오라누르 실험(Oranur Experiment) 방사능 소명에 도전하다.

미국으로 이주한지 3년뒤 1942년에 라이히는 메인(Maine)주 레인제리(Rangeley)에 오르곤연구소 라는 자그마한 연구센타를 건립하고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그 자신이 발간하는 오르곤저널(The International Journal of Sex Economy and Orgone Research)을 통해 널리 홍보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까지 오르곤연구소 주 연구활동은 오르곤에너지와 생명체의 상호 관련연구 및 생체치료에 시간이 거의 대부분 투자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인류는 새로운 원자력에너지와 그 가공할 파괴력에 노출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때부터 라이히는 핵방사능이 생체에 미치는 끔직한 결과들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방사능물질을 오르곤에너지로 중화시킬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핵방사능이 생물체의 세포나 혈액에 엄청남 부작용을 미친다면, 거꾸로 암세포까지 치료하는 효과를 보이는 오르곤에너지로 방사능을 중화 또는 상쇄시킬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1950년 12월에 라이히는 원자력에너지위원회로부터 몇종류 방사선 동위원소를 구입하여 오르곤연구소 내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오르곤 집적상자 안에 넣어두는 실험을 실제적으로 실행한다. 이 실험을 위하여 특별히 제작된 20겹으로 구성된 강력한 오르곤 집적상자 안에 1mg의 방사성물질을 넣어두고 상태를 지켜보았다. 이것을 오라누르(Oranur:Orgone-Anti-Nuclear)실험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라이히는 명백히 방사능이 감소하는 실험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 못했던 더욱 커다란 부작용이 발생하고 말았다. 2개월 뒤에 오르곤 집적상자에서 동위원소 라듐을 꺼집어내어서 조사해본 결과 현저하게 방사능이 감소되었음이 검증되었고, 이 라듐물질은 바로 두꺼운 납상자에 밀봉되어 멀리 매립처분되었다.

그러나 이 오라누르 실험에 참가하였던 거의 전원이 실험기간 내내 원인 불명의 강한 두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렸으며 절망스런 부정적 감정에 휘말리곤 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 실험은 2개월 만에 중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후로 일년 이상이나 동일한 현상이 지속되었으며 게다가 연구소 주변의 넓은 영역에까지 똑같은 영향력이 발휘되었다. 연구소 일대의 하늘에는 항상 기분 나쁜 먹구름이 떠 있었고 호수에는 파도조차 일렁거리지 않았다. 무언가 사악한 기운이 연구소와 그 주변을 계속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다.


이 당시 레인제리 연구소 주변의 풍경을 <오르곤 에너지 회보>(1952년 10월호)에서 인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마치 살아있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다고 표현할 수 있다. 새들조차 지저귀는 것을 멈추었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우는 것을 멈추었다. 그 어디에도 살아있는 소리가 없다. 새들도 낮게 날아다니며 나무에 몸을 감추었다. 동물들은 숨죽이며 움직이고 낮게 기어다녔다. 나뭇잎과 상록수가 무척이나 슬퍼보인다. 잎은 축 처지고 탄력과 직립성을 잃어버렸다. 나무와 풀은 마치 죽어가듯 거무칙칙해져갔다. 그 모습이 너무도 검어 오히려 청백색이라는 인상을 준다.(라이크로푸트<라이히>)"

이것을 라이히는 DOR(Dangerous Orgone)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생명에너지인 오르곤에너지(生氣)가 핵방사능과 결합하여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파괴적인 DOR에너지(死氣)로 변환되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론적 해석을 깊이 연구할 여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오히려 라이히에게 시급히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이 무겁고 기분나쁜 기운을 속히 제거해 버릴 수 있느냐하는 실질적인 것이었다. 이로부터 인공 기상조절 기술이 탄생되었다.

인공 기상조절공학 탄생

라이히의 연구에 의하면 오르곤에너지는 물과 대단히 강력한 친화상을 갖는다. 마찬 가지로 DOR도 물과 친화성을 가지는데 이 DOR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먹구름이 대기 중에 존재하면 넓은 범위에 걸처서 생체에 부정적인 영향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오르나르 실험을 통해 연구소에서 발생한 DOR이 연구소 공중의 먹구름을 형성시켰다고 파악한 라이히는 우선적으로 이 먹구름을 소멸시켜야만 하였다.

1952년 4월. 황폐해진 레인제리연구소로 혼자 돌아온 라이히는 좁은 금속체 파이프를 먹구름을 향해 설치해보기로 하였다. 파이프가 먹구름을 향한 순간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DOR먹구름은 눈에 띄게 작아졌다. 이 성과에 고무된 라이히는 비구름의 발생과 소멸에서 회오리, 벼락, 태풍과 기타 기상현상이 오르곤 혹은 오르곤이 전화된 DOR의 집중적인 흐르는 기능에 수증기가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대포 모양의 좁은 금속파이프를 수도관과 결합시켜 먹구름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 수도관은 깊은 우물에 연결시켜 담구어 놓았다. 물이 오르곤에너지 혹은 DOR에너지와 친화성 있는 성질을 이용하여 공중에 떠있는 먹구름 속 DOR을 우물로 끌어내려는 발상이었다.

파이프를 먹구름 쪽으로 향하여 설치하자 실제로 경이로운 효과가 발생하였다. 먹구름이 눈에 띄게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레인제리 연구소 주변의 분위기는 다시 옛날의 평화를 되찾게 된다.

이 실험을 통해서 라이히는 대기 중의 오르곤 혹은 DOR을 조절함으로써 먹구름 소멸이나 비구름 발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연히 알아내게 되었다. 이후로 더욱 정밀한 물대포 파이프 장치-클라우드 버스트라 명명- 가 고안되어 만들어졌으며 본격적인 인공기상 조절실험들이 실시된다.

이 실험들에 사용되어진 클라우드 버스터장치는 금속 파이프 몇개가 평행으로 묶여져 있어 마치 다연발 고사포 같은 외형을 하고 있다. 금속파이프는 길이가 약 4m 정도로 망원경처럼 길이를 조절할 수 있게 제작되어 있으며 파이프 하단은 수도관이 연결되어 수도관 끝을 물 속이나 젖은 땅속으로 이어지도록 연결한다.

이런한 장치가 어떻게 대기나 구름 속의 오르곤에너지를 흡수하는 지에 대해서 라이히는 피뢰침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번개는 구름 속의 정전기가 한순간에 방출되는 방전현상이다. 이 번개를 피하기 위해 설치하는 피뢰침은 방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전기를 대지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클라우드버스터장치는 대기나 구름 속 오르곤에너지 밀도가 달라지면 구름이 없어지기도 하고 생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먹구름을 없애기 위해서는 클라우드버스터의 금속파이프를 구름 한가운데로 조준한다. 그러면 구름 속의 오르곤에너지가 서서히 파이프로 흡수되어 구름 속 오르곤에너지 밀도가 옅어지고 따라서 수증기들의 결합력이 약해져서 구름은 결국 소멸되고 만다.

이와 반대로 구름을 만들어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름이 없는 빈 대기 공간에 파이프의 끝이 향하도록 조준한다. 그러면 그 공간 상의 오르곤에너지 밀도가 희박해지고 이것이 전체 대기 속의 오르곤에너지 분포에 심한 불균형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대기 속에서 오르곤에너지 소용돌이 흐름이 형성되고 이것이 공기 속에 수증기를 형성시키며 결국 구름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라이히는 1953년 7월 6일 최초의 인공강우실험에 성공한다. 이 실험에는 노르웨이 시절부터 라이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정신분석학자 오라 레크네즈가 함께 동반하였다. 이후에 라이히는 이 클라우드버스터장치를 이용하여 사막을 녹지화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1954년 10월. 라이히와 그의 연구팀들은 두 대의 클라우드 버스트를 싣고 메인주에 위치해 있던 오르곤연구소를 떠나 저 멀리 아리조나주의 카슨사막 지대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10월29일 카슨사막에 도착한 릴행은 1955년1월 초,처음으로 이 황량한 사막에 비가 내리게 하는 데 성공한다.

라이히는 사막이 생성된 이유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단순히 강우량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 이전에 DOR이 과도하게 생성되어 생명력이 상실되고 이것 때문에 사막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로 보았던 것이다. 때문에 사막지대에서 클라우드버스터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인공강우 뿐 아니라 DOR을 제거하여 다시 생명이 가득찬 녹지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954년 10월에 카슨사막지대에서 행한 인공강우실험 때문에 장구한 시간동안 생명체라고는 풀 한포기 없던 이 황량한 땅에서 실제로 목초가 싹을 틔우기 시작해서 30cm 정도의 크기까지 자라났다고 라이히는 기록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들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54년에 미국 FDA( US Food and Drug Administration:미국 식품위생국)에서 라이히의 오르곤에너지 집적장치를 불법의료 장치로 법정에 기소하는 상황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라이히의 죽음과 불타버린 저서들

미국으로 건너온 뒤인 1940년대에 라이히의 주된 연구와 작업은 오르곤 집적장치 개발과 이를 구체적으로 응용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결과물 중 하나로 오르곤 집적상자를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사례를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그 성공만큼이나 라이히를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특히 기존의 의료계와 의사협회의 비난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이들의 압력으로 미국에서 불법 의료행위를 감시하는 미국 식품위생관리국(FDA)에서 라이히를 조사하게 된다.

FDA 조사요원들의 태도는 지극히 불공정하였음이 명백하다. 라이히는 처음 오르곤에너지에 대한 과학적인 실험조사를 함께 실시해볼 것을 FDA측에 제안하였으나,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르곤의 존재여부나 오르곤 집적상자에 대한 실험과 조사는 하지 않고,FDA측은 소문과 루머 그리고 라이히를 비난하는 의사들 이야기만 모아서 라이히의 연구행위를 불법의료행위로 단정짓는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들은 인류역사와 과학사 속에서 종종 행해졌던 사회적 병폐에 다름이 아니다. 천동설로부터 지동설로의 과학혁명을 야기시켰던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을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서 확인하였고 이 결과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당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던 교회와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은 교리에 위배된다는 지극히 관념적인 견해에 입각하여 갈릴레이를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을 들여다 보아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갈릴레이를 단죄한 사람 중에 망원경을 통해서 그의 주장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이히의 오르곤에너지와 오르곤 집적상자의 경우도 같은 상황이었다. 1950년대에 미국이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암에 대한 특별한 치료약은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또한 현재에 와서는 전체 사망원인 중, 암에 의한 사망률이 제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암발생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아직도 항암제치료와 방사선치료 이외의 자연요법이나 기타 민간요법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1950년대 당시의 미국사회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라이히 자신은 오르곤 치료요법이 암 치료에 특효를 가지고 있다고 상업적으로 선전한 적이 결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곤 집적상자를 이용해 본 많은 환자들은 이 단순한 건강회복 방법으로 암까지 치료되곤 했다. 이러한 이유와 그 가능성에 대해서 라이히는 객관적인 자세로 계속 탐구했으며 그 결과를 자신이 발간하는 학술잡지에 게재해 나갔던 것이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라이히는 오라누르실험 이후로 인공강우실험에 거의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었고 1953년도에는 아리조나 카슨사막에서 한창 인공강우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이미 FDA와의 법정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라이히가 사막에서 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FDA측에서는 라이히의 오르곤 집적장치가 불법 의료행위라는 많은 법적근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근거에 의거하여 FDA는 라이히에게 의료적인 활동을 일체 금지할 것을 명령한다.

라이히는 FDA의 이러한 소환명령에 불응하였고 따라서 더욱 무거운 강제집행 결과를 초래한다. 1954년 3월에 메인주의 미국 지방법원은 오르곤에 관련된 서적물 자체를 출간 금지시키는 내용의 판결을 내린다. 이에 대하여 라이히는 미국법정이 자신의 전생애에 걸친 과학적인 연구활동을 강제적으로 금지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연구실로 되돌아와서 계속 연구활동을 재개하였다.

결국 라이히는 금지명령에 불응한 죄목으로 1596년에 법정에서 3년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기에 이른다. 더불어 FDA에 의해 강제적으로 모든 서적물과 연구자료들이 압수되어 소각처리된다. 그리고 일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57년 9월에 펜실바니아주의 루이스파크 연방형무소에서 심장발작을 일으킨 라이히는 60세 나이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라이히가 강제 구속되던 시점에 메인주의 오르곤연구소에 머물고 있던 라이히의 조수 미첼 실버트박사와 빅터 소베이박사는 커다란 트럭을 몰고온 FDA직원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연구소 내를 샅샅히 뒤져서 모든 서적물과 연구자료들을 압수해 트럭에 싣고서는 곧장 맨하탄 소각장으로 달려가 명령대로 이행하였다.

FDA의 이러한 행위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장 중요시하는 미국헌법과는 정면으로 상치하는 것이다. 왜 FDA는 실제적인 불법 의료행위의 단속이라는 임무를 벗어나 굳이 라이히의 연구결과조차 세상에서 지워버리려고 했을까?

라이히가 죽고난 3년 후, 라이히의 추종 계승자들에 의해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물의 대부분은 다시 재출간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에 의해 전문적인 교육과정으로서 미국 올고노미 칼리지(The American College of Orgonomy)가 설립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후로 라이히의 연구와 발명들은 조금씩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현재에는 미국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그리고 일본 등에서도 라이히의 연구를 이어받아 탐구를 계속하고 있는 의사와 과학자그룹이 늘어나는 상황에 있다. 하지만 라이히의 연구결과가 지니는 그 중요성과 실용성에 비한다면 아직도 기존학계의 반응은 여전히 무관심과 냉담함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