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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 투병기

넘어진 그 자리에 머물지 마라 (어느 정신과 의사의 암투병이야기)

라이프케어 김동우 2019. 5. 18. 18:29






넘어진 그 자리에 머물지 마라 (어느 정신과 의사의 암투병이야기)

 

나는 트라우마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 의사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암이라는 트라우마가 찾아왔다.평소 현미밥 도시락까지 챙겨 출근할 만큼 건강관리를 철저히 했기에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 하필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분노와 우울, 원망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암 진단과 치료 과정이 트라우마를 겪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첫째, 평소 예측하지 못했지만 갑자기 찾아온다.

둘째, 꼼짝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에 압도당한다.

셋째,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공포를 경험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암에 걸리면 우울증, 불안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고통을 겪는다.

 

난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암에 관한 과학적인 정보도 찾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암 투병기도 읽으며 내 처지와 비교해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겪은 극심한 감정 기복이 대부분의 암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임을 알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깨달음은 뜻밖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암으로 인한 고통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고통을 견디게 해줄 힘이 되기엔 충분했다.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암 환자 중에서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오진으로 암 진단은 늦었지만 암세포가 많이 퍼지지 않은 상태였고 친구와 선후배의 도움으로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항암 치료도 신속하게 마쳤다.

 

하지만 항암 치료가 끝난 지 벌써 2년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재발의 두려움을 느낀다.암세포란 놈이 언제든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하루는 3개월마다 하는 추적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 검사 결과만 괜찮으면 웬만큼 안심해도 된다는 판결을 받으러 가는 셈이었다.진료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내 순서가 자꾸 미뤄졌다. 간호사에게 항의했더니 아직 검사 결과가 안 나왔다는 게 아닌가? ‘

 

일주일 전 의뢰한 검사 결과가 왜?’ 불길한 예감에 긴장해서 앉아 있는데 주치의가 불렀다. 소장과 대장이 이어지는 곳에 예전에는 없던 뭔가가 보여 정밀 판독을 의뢰했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나온 나는 맥이 풀려 의자에 쓰러졌다.

아내는 괜찮을 거라고 나를 위로했지만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1시간 30분을 기다리던 나는 불안해서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었다.답답한 마음에 병원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소아암 병동이 보였다.게임기를 만지작거리는 빡빡머리 아이와 선잠 자는 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마침 주사실에서 나온 간호사가 아이 이름을 부르자,아이는 자지러지게 울며 가기 싫다고 발버둥을 쳤다.아이가 끌려 들어간 주사실 문이 닫히자 주위는 갑자기 고요해졌다.그 짧고 강렬한 소란을 보면서 아이에게 강한 연민을 느꼈다. ‘

 

저 아이에 비하면 난 그나마 오래 살았구나.’다시 발길을 돌려 진료실로 돌아왔더니 아까보다 더 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나의 동지들이었다. 문득 세상 모든 사람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 뿐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정밀 판독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재발은 아니었다.나는 앞으로 암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어쩔 수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하지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어쩔 수 있는 노릇도 분명 있다.그것은 이전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일이다.2년 동안 암과 싸우면서 나는 일상의 행복을 뒤로 미루지 않고 원하는 방식대로 살기로 했다.

 

지치면 쉬어 가고, 먼저 사랑을 표현하고, 항상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한다.암은 내게 남은 시간 동안 후회 없이 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는 잘 살아갈 것이고, 동시에 잘 죽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김준기_ 국내에서 대표적인 트라우마 연구자로 손꼽히는 정신과 전문의입니다.

마음과마음 원장, 식이장애 클리닉 원장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한 암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에세이 <넘어진 그 자리에 머물지 마라>를 집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