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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난소암 극복기 / 윤은혜(62년생) | 난소암 3기 5년차

라이프케어 김동우 2022. 7. 28. 12:44

말기 난소암 극복기 / 윤은혜(62년생) | 난소암 3기 5년차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사망예고 통보를 받다

 

윤은혜(62년생) | 난소암 3기 5년차

 

2015년 4월 어느 날. 유방이 저려서 서울 미즈메디 산부인과에 검진 차 들렸었다. “오신 길에 초음파도 해봅시다.” 의사의 권유에 우연히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예상과 달리 담당의는 심각한 얼굴로 “급히 삼성병원을 예약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 삼성병원 산부인과 병동 3인실에 입원했고 서울 삼성병원 교수가 사복을 한 수간호사와 젊은 의사 둘을 대동하고 내 침상 앞으로 왔다. 없는 기운에도 나도 모르게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고 침상 옆에 넋 놓고 앉아있던 남편도 자동으로 일어섰다.

 

“잘 주무셨어요?” 의례적 인사를 건넨 주치의는 우리 부부를 바라보며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수술을 해보니 종양이 ○○부위까지 침범했기에 3기입니다.”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무성영화 속 화면처럼 입술의 움직임만 보이기 시작했다.

 

뇌 속의 피가 일시에 빠져나갔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머릿속이 텅 빈 백지장 같았다. 나도 모르게 옆을 바라보니 하얗게 변한 남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 역시 의사에게 어떤 자비의 한마디라도 구걸하는 듯 교수의 입만을 간절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담당교수는 굳은 얼굴로 일행을 몰고 타 병실로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남편은 교수 꽁무니를 쫒아가려 했으나 이내 수간호사에게 제지당했다.

“교수님 바쁘시니까 나중에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양성입니다.’, ‘1기니까 수술만 하면 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수술 전에는 주치의가 ‘1기 아니면 2기로 추정됩니다.’라고 설명했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남편을 향해 쓰러지듯 무너졌다. “나 3기래. 이제 가족들하고 다시는 밥 한 번도 먹을 수 없는 거야?” 남편도 나를 안고 말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나는 그 후에 담당 간호사나 의사들을 붙잡고 “수술 받으면 살 수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건성으로라도 살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더 바쁜 듯 나를 피하기 급급해 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설명해준다고 제지하던 수간호사가 병실에 왔지만 설명 대신 남편을 데리고 나갔다. 궁금했던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응. 간호 잘하라던데.”라며 어물거리던 남편. 후에 알게 된 내용이었지만 수간호사는 복도 끝 조용한 곳으로 남편을 불러서는 “보호자에게는 사실대로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제가 25년간 환자들을 보아왔는데 아내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심한 불면증과 중증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소소하게는 발가락에 큰 티눈까지 달려 있었다. 티눈 때문에 산보조차 안하겠다는 나를 보고 ‘걷는 운동조차 안하면 어떻게 암을 극복하느냐?’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2년 여간, 나는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 변비, 발가락 물집 등으로 그야말로 자지 못하고, 싸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최악의 건강상태였다.

 

훗날 한 살 아래의 여동생은 내가 아파트에서 뛰어 내릴 정도의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다고 했다. 난소, 자궁 제거 대수술한 당일조차 수면제를 처방해달라고 떼를 쓰니 ‘수면제를 달라고 떼써서 처방해준 환자는 당신이 처음이었다.’라던 주치의의 말이 생각난다.

 

지나간 후에야 들었지만 당시 남편도 마음속으로 “그 어렵다는 난소암 3기, 심한 불면증과 심한 변비, 중증의 우울증, 티눈으로 인한 보행불가. 한 가지도 감당 못하겠는데 참 가지가지 한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나도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과 수면, 배변은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3대 요소라던데 말기 암에, 수면장애, 운동 불능, 변비까지 내가 생각해도 가지가지 하는 것 같았고, 치료는 요원해보였다.

 

“당신 없으면 못산다!”고 고백해 나를 울린 남편

“엔돌핀 박사” 이 상구 박사와의 만남

 

이때부터였다. 남편의 핏속에 잠재되어 있던 끼가 발동한 것은. “이봐, 해봤어?”라고 알려진 정주영 왕회장님의 현대근성이 남편에게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중동사막에 나가면서 악바리 근성을 체득한 남편은 난관에 부닥치면 돌파력이 유달리 강했다. 집요한 노력으로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하곤 하여 ‘해결사’라는 별명이 있던 남편이었다.

 

리암니슨 주연의 영화 ‘테이큰(TAKEN)’- 애지중지하던 딸이 여행 중 마약 인신매매 갱단에게 유괴되었을 때 아버지가 이를 단신으로 구해내는 영화를 보고 ‘나도 내 가족이 유괴된다면 저렇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중얼거리던 남편이었다.

 

이번에는 갱단이 아니고 저승사자. 딸이 아닌 아내. 남편이 나를 구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남편의 얼굴과 리암니슨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어린애처럼 남편 그늘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남편이 유일한 의지처였다.

 

넋 나간 듯 했던 남편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시신처럼 누워있던 나를 일으켜 4시간 동안 강원도로 향해 운전했다. 드디어 목적지인 오색약수터 인근 산속 어느 펜션 2층 건물로 들어가니, 키가 거구인 백발의 노인이 지하에서 올라왔다.

 

한눈에 그가 ‘엔돌핀 박사’로 유명한 이상구 박사임을 알 수 있었다. 미국 내과의사인 그는 자신의 현대의술로 암환자들을 치료하다가, 회복되지 않는 많은 암환자들을 보고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번민 끝에 의사자격을 접고 “뉴스타트 운동”이라는 자연치유학교를 운영하며 많은 암환자들을 치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둘러보니 병원간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박사는 우리에게 “이곳에 입소하여 자연음식과 운동, 명상 등 자연치유를 먼저 해보고, 그 후 수술, 항암을 고려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나는 이상구 박사님의 강의를 많이 들어 그분의 이론에 공감했으며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불안으로 가득했던 우리에게는, 그분의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말기 암은 성장이 빠르니 우선은 수술을 최대한 빨리하고, 그 후 뉴스타트에서 지도하는 자연치유요법들을 시행하자. 우선은 수술하기 전에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요양병원에 입원을 해서 체력과 면역력을 높여 수술 후 회복에 대비하자.”라며 나를 산속 요양병원으로 데리고 들어가 입원시켰다.

 

깊은 산속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는 차안에서도, 나는 계속 남편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왜 나를 이 깊은 산속에 데려오는 거야? 나 버리려고?” 대화상대도 되지 않던 나의 질문에 기가 찼는지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산 깊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요양병원에서 “사랑한다” 고백한 남편

비타민 C, D와 고가의 영양제……. 10여일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루의 낭비도 없이 남편의 프로그램은 계획성 있게 진행되었다. 산을 싫어하던 나는 산에 가자던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깊은 산은 싫어! 병원 음식도 싱거워서 맛없어.”

“산책길에 뱀을 본 사람이 있대. 산에 안 갈래!”

“1인실 아니면 잠이 안와!”

“발가락 티눈 좀 봐. 이렇게 크단 말이야.”

 

남편은 어린아이같이 투정하는 나를 데리고, 1인실에서 같이 지내며 나의 암 코치 역할을 시작했다. 남편이 옆에 있다는 생각에 덜 불안하고 든든했다. 남편은 자는 시간외에는 모두 암 공부에 몰두했다. 자신이 먼저 잠들면 코를 골아 내가 숙면에 들지 못할까봐 밖에 나가 있다가 내가 약을 한주먹 먹고 잠드는 시간인 11시가 넘어서야 조용히 들어와 잤다. 신발을 밖에서 벗고 도둑고양이처럼 들어와서…….

 

나중에 안 얘기지만, 수술을 1개월만 늦추면 3,500만원이라는 거액의 암진단금이 나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상구 박사의 권유대로 잠시 그곳에 입소해 체력을 보강하고 수술을 했더라면 보험금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오히려 남편은 병원 측을 독려하여 수술을 최대한 앞당겼다. 말기 암의 급속한 성장, 전이를 우려한 결과였다. 3,500만원이 날아갔다. 내가 더 안타까웠다. 하지만 남편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느 날, 청평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점심 식사 후 산책하던 시간이었다. 남편이 느닷없이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당신 없이는 못산다! 날 위해서라도 꼭 살아다오!”

 

난 그 소리에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 애정 어린 말을 단 한 번도 안했던 남편이었기에 더욱 고마웠다. 실제로 여성 암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 그중에서도 남편의 사랑이다. 남편의 사랑이 치료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아내를 요양병원에 두고 면회조차 뜸한 남편들을 본다. 남편들은 치료는 의사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 나는 돈만 대주면 되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의사가 5% 고치고, 가족의 사랑과 관심이 95%를 고친다.’ 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결국 그 아내는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고 치료에는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실제 스탠포드 대학교 숀 맥케이 박사는 통증을 가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았던 실험자는 44%의 통증감소가 있었다고 한다. 도파민(기분이 좋아지는 뇌의 화학물질)의 분비가 증가되었던 것이다.

맥케이 박사는 “사랑은 놀라운 진통제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사랑은 놀라운 진통제이자 놀라운 치료제이기도 하다.

 

 

 

 

 

머리 감다가 가발 벗듯 벗겨진 머리카락

 

말기 난소암 극복기 - 두번째 이야기

글: 윤은혜(62년생) | 난소암 3기 5년차

 

 

삼성병원에서 수술 후 3인실에 있을 때였다. 옆 침대의 여성 환자가 말기 암으로 인한 통증으로 수시로 비명을 지르곤 했다. 단말마적인 비명소리에 간호사들이 뛰어오고, 배에 가득한 복수를 빼내고, 마약성 진통제를 놓고는 했다. 극심한 통증으로 비명이 지속되었으나 달리 치료할 방법이 없는 듯 병원에서는 응급조치(복수제거, 진통제 주사)만 할 뿐이었다.

 

말기 암인 나도 곧 저렇게 되겠거니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남편에게 그 환자에 대해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남편은 그 환자의 남편과 지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사연을 들었으나 나에게 미칠 심리적 악영향 때문에 감췄던 것이었다. 그 환자 남편에 의하면 불과 1년 전 “다행히 1기입니다. 조기발견이 매우 어려운데 천운입니다.”라고 통보받았다고 했다.

 

병원 측 권고대로 식생활이나 생활패턴의 변화도 없이 3개월마다 정기 검진만 충실히 받아왔단다. 그런데 1년쯤 되어 말기 진단을 받았고 이제는 여명이 3개월 정도라고 ‘사망예보’를 받았던 것이다. ‘천운이다. 3개월마다 검진 받아라.’라고만 하지 말고 재발 방지를 위해 면역력 증강에 힘쓰라는 말 한마디만 해줬더라면 하며 환자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했다고 했다.

 

남편은 내게 미칠 심리적 두려움이 염려되어 병실을 옮겨달라고 했으나 병실 부족으로 거절되었고, 그녀의 비명소리가 커질수록 나의 두려움도 점점 커져만 갔다.

 

얼마 후 병원에서 퇴원명령이 떨어져 나는 춘천 인근 암스트롱 병원으로 입원하였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병원 앞마당에서 남행열차 등 가요를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는 환자들 서너 명과 인근 벤치에서 환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남편은 저렇게 흥을 내며 지내야 치료에 좋다며 나보고도 나가서 함께 춤도 추며 어울리라고 했으나 나는 춤을 출 기분이 나지 않아 벤치에 앉아 억지 박수만 쳤다.

 

저들도 치유를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려니 하는 생각에 흥겨워 보이기는커녕 처량하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그때 옆에서 함께 박수를 치며 흥을 돋아주던 병원시설관리의 입에서 가슴 섬뜩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기 계시다가 친했던 퇴원 환자들에게 1~2년 후 안부전화를 하면 전화를 안 받아요.” 뒤늦게 귀를 막고 싶은 소리였다. 그 말은 비수같이 내 가슴에 내리꽂혀 한동안 뇌리에 맴돌았다.

 

항암을 마치고 요양병원에 들어온 후 제일 나를 괴롭혔던 것은 심한 변비였다. 관장도 시도했지만 항문 끝에 돌처럼 굳어진 변 덩어리는 철통 수문장이 되어 배변을 막고 있었다. 항문을 만져보면 딴딴한 돌덩어리가 만져지는 듯 했다. 병원에서 시도하는 방법들도 소용없었다.

 

매일 암에 대한 대체의학을 공부하던 남편은 끼니마다 효소를 먹이고, 한 시간마다 물 을 마시게 하고, 배에 온열조치를 했다. 모두 소용이 없었다. 독한 항암제가 대장 내 점막세포들을 괴롭혀 장내 연동운동이 정지된 것이었다.

 

급기야 변비가 7일째 이어지자 나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남편이 손가락에 들기름을 묻히더니 내게 손짓하였다. 손가락으로 항문 속에 넣어 파내준다고 화장실 변기에 앉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신 시어머님 대변도 그렇게 파냈다고 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부부사이라도 나는 치부를 남편에게 맡기기 싫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는 내가 한다고 외치며 남편이 시키는 대로 기름을 손가락과 항문에 바르고 ‘손가락 파내기’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큰 바위의 일부를 떼어낸 듯 변 덩어리가 작게 부셔져 나올 뿐이었다. 효과가 없는 것 같아 포기하려 했으나 계속하라는 남편의 잔소리에 조금씩 파내다가 마침내 큰 덩어리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하였다. 항문 끝을 막고 있었던 주먹만한 큰 덩어리가 빠져나오자 연이어 7일간 막혔던 변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시어머니를 돌보았던 남편의 경험에서 나왔다지만 처음에는 손가락을 항문 속에 집어넣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치료법(?) 덕분에 이후부터는 변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햇볕 쬐며 만보 걷기, 한 시간 동안 식사하기, 아침 공복에 온수 2컵과 복부 마사지, 지압봉 위 걷기, 10시 취침, 매 수저마다 100번 씹기, 1시간마다 물 마시기, 효소와 유산균, 복용하기, 아랫배를 따뜻하게 벨트로 24시간 온열을 유지하기 등을 변비가 무서워서 열심히 했다. 이후 변비는 오지 않았다.

 

남편은 하나하나 내 식생활, 운동, 물 복용 등 지도에 더하여 일본 동경대 항암제품 등의 복용을 권했다. 무엇보다 제일 역점을 둔 것은 말기를 극복한 치료 성공 비결들에 대하여 의학적, 논리적으로 소개하여 절망했던 내 정신세계가 완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갖게 한 것이었다.

 

또한 꺼져버린 내 신앙의 불꽃도 다시 살려주었다. 예수님도 ‘나에게 일어나 걸으라’며 응원하고 계시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모든 폭풍의 터널 끝에 밝은 태양을 예비하신 분이라며 내게 일어나 걸어오라 손짓하고 계시다고 설득하였다. 마침내 나는 아침마다 기독교 방송을 틀어놓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상구 박사님의 강의도 여러 건 들려주었는데 참 유익했고 그 중 기억에 남는 내용을 하나 소개한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합니다. 나는 바닷가에 와 있습니다. 갈매기가 한 마리 날아옵니다. 끼르륵 소리를 내며 갈매기는 물속으로 내리찍듯 잠수하여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갈매기는 백혈구이고 그 물고기는 내 몸속 암세포입니다. 끼르륵, 끼르륵 갈매기 두 마리가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내 몸속의 암세포 2마리가 백혈구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갈매기 숫자도 점점 많아졌다. 미국의 병원에서 도입했던 심리치료법 중 하나의 사례였다고 하셨다.

 

지금도 몸서리치며 끔찍했던 기억이 있다. 삼성에서 1차 항암을 하고 퇴원 후 얼마 안 되어 남편은 다른 환자들과 산에 다녀온다며 산행을 하던 날이었다. 같이 가자던 제의에도 나는 전날 산행을 했던 환자들이 뱀을 봤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 욕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그런데 손가락 사이로 뭉텅 하는 느낌과 함께 큰 덩어리가 잡혀 나왔다. 깜짝 놀라서 손을 보니 마치 가발을 통으로 벗겨낸 듯 시커먼 머리카락 덩어리가 잡혀 있었다. 너무나도 놀랍고 무서웠다. 거울을 보니 마치 좀비처럼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있는 한 추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남편에게 전화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죽어 가는데 무슨 등산이야!”

 

항암 후유증의 시작이었다. 탈모와 더불어 식욕은 사라지고 입안이 헐기 시작했다. 변비, 부종 등의 증세들과 함께 수술한 부위의 통증들이 따끔거리며 수개월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난 호에는 수술 후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극심한 변비를 극복하는 과정과 함께 머리를 감다가 가발 벗듯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는 고통의 순간을 적었다. 또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을 신경정신과 약 대신 식이, 운동, 장 청소, 장 생태계 개선 등으로 한 단계씩 대체의학으로 치료하며, 생활패턴을 변화시키고 신앙을 통하여 무너진 정신건강을 다시 회복시키는 시간들을 회상하였다.

 

나를 위로하던 따뜻한 이발사

어느 날 매일 거울을 쳐다보며 빠진 머리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나에게 남편은 인근 가평 시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밀자고 했다. 나는 가발을 사달라고 했다. 남편은 최고급 수제 가발을 사 줄 테니 우선은 머리를 밀고 두건으로 대체한 후 천천히 좋은 가발을 골라보자고 했다.

 

시내에 나가다가 이발소를 발견했다. 먼저 남편이 이발소 내에 손님이 없는지 살펴본다고 정탐을 나간다며 뒤에 있으라고 손짓하며 앞서 나갔다. 마치 척후병처럼 이발소 안을 염탐(?) 하던 남편이 드디어 손짓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남자 손님이 한 명 이발 중이었다. 창피해 망설였으나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척후병 역할을 제대로 못했던 남편을 속으로 원망하며 이발사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모두 나를 쳐다보는듯했지만 눈을 감고 두건을 벗어 내 치부를 드러냈다. 다행히 이발사는 눈치가 빠르고 배려심이 많은 분이었다.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않고 “머리 밀러 오는 분들도 많아요. 걱정 마세요. 예쁘게 깎아 드릴게요.”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따뜻한 위로였다. 이발 중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몇 번이나 이발사가 이발을 멈추고 휴지를 손에 쥐여 주어야 했다.

 

어떤 약사와 우연히 만남

남편은 암 공부를 하다가 수시로 암 치료 약 개발 권위자들을 만나러 나가곤 했다. 항암 2차를 앞둔 암울했던 어느 날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남편은 암 연구를 하던 생명공학과 교수님이 개발한 ’대사 항암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알아보던 시기였다. 세포독성 항암제를 넘어서는 세계 최초의 4세대 ‘대사 항암제 특허’를 낸 000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대사 항암제는 독성이 없어 기존 항암제와의 병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신치료법이 후에 세브란스 정 00 교수, 국립암센터 김 00 교수 등 국내 최강의 임 박사 팀이 연구하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발행하는 세계적인 신경종양 학회지 ‘뉴 클로 온 콜로디(Neuro-Oncology)에 발표하여 소개된 동일한 치료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도움을 청하려 그 대학교 총장님까지 만나려고 시도하였다. 지인이었던 당시 박주선 국회부의장도 안타까워하시며 도움을 주시려고 정말 많은 애를 써주셨다. 정치인은 진정성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는 그분의 애정 어린 도움을 보며 그 인품에 늘 감사드리고 있다.

 

참고로 1세대 항암제는 화학(세포독성) 항암제, 2세대 항암제(90년 중반 이후)는 암세포만 공격하는 표적항암제, 3세대 항암제(2010년부터)로 ‘면역항암제’가 개발되었으나 2,3세대 항암제는 대상자가 제한적이며 모든 환자에게 효과적이지 못하고 고가인 단점도 있다.

 

대사 항암제는 독으로 모든 세포를 죽이는 치료가 아니라 암세포가 에너지를 얻어야 분열, 증식, 전이하는 데 에너지를 얻는 대사 경로를 차단하여 ‘암을 굶겨 죽이는 치료법’이다. 그러나 그 교수님의 대사 항암치료법이 세포실험과 동물실험 그리고 임상 1상 정도의 진행과정에 있는 단계여서 내게 적용할 방법이 없었다.

 

남편은 집요했다.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일본의 암 전문 병원에서 ‘대사 항암제’ 치료법을 환자 치료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내었다. 통역사를 구해 일본 병원에 자문을 구하고, 천신만고 끝에 그 제품과 더불어 남편은 독일에서 암 치료에 특효라는 흰 파우더와 일본 동경대에서 개발했다는 제품도 복용을 권유했다.

 

철부지였던 나는 남편이 천신만고 끝에 구한 그 대단한 제품들의 복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병원에서 주치의에게 ‘항암 중에는 아무것도 복용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기가 막혀 하며, “항암 시 복용해야 한다, 항암이 다 끝나면 내성이 생겨 늦는다. 부작용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요지부동이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 약사

남편도 걱정이 됐는지 한발 물러섰다. 어느 날 남편은 춘천 시내 외곽에 위치한 ‘대학 약국’에 가서 일면식도 없고 나이 지긋한 약사에게 처방을 보여주며 자문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제 아내가 암 말기인데 이 처방을 써도 될는지요?”

나이가 지긋한 약사가 처방을 검토한 후

“내 아내가 암이라면 나는 이 처방대로 복용하겠습니다. 부작용은 없는 성분들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백배 용기를 내어 내게 권유를 강하게 했다. 어차피 담당 병원에서도 치유가 어렵다고 했기에 모험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었다.

 

“당신이 안 죽는다고 먹으라는 거야?" 이 말에 남편은 화가 났을 것이다. 나를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남편에게 덧붙여 모진 말까지 했다. “이 처방을 먹고 죽으면 내가 죽지 당신이 죽어? 당신이 죽지 않는다고 내게 강요하는 거야?” 이 말에 남편은 큰 쇼크를 받은 모양이다.

 

잠시 후 남편도 소리 질렀다. “당신 두고 집에 갈 테니 의사하고 알아서 해!”

당시 남편은 수간호사에게 개인적으로, ‘너무 늦어서 치료가 불가능하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통보를 받았던 터라, 살리지도 못할 대학병원 치료만 충실히 따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었다고 나중에서야 이야기한다.

 

남편이 강요했던 대사 항암제는 일본 일부 병원에서 시행되는 암 치료법으로 암세포의 에너지 생성과 물질 합성, 증식 신호전달을 효율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다고 알려진 처방이었다. 일본 병원에서도 항암 시 병용을 해도 무방하다는 권유를 받았던 제품들이기도 하였다. 결국 심한 우울증으로 어린애 같았던 나는 남편의 무서운(? 당시 무서웠음) 협박에 겁을 먹었고 그 약들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남편이 당시 국회부의장, 대학 총장, 교수와 같은 분들을 만나기도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통화하는 모습을 모두 보고 들었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간과 신장 수치가 정상수치에서 벗어나면 모든 대체요법을 중단하겠다는 남편의 설득

사실은 평소에 남편은 강요 대신,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나를 설득하곤 했다. 남편이 복용을 요구하는 건강 제품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일본 수상과 레이건 대통령의 주치의였다는 ‘신야 히로미’ 의학박사의 이론을 소개하며 위, 장에 독소를 제거하고 식생활의 변화(현미 등 통곡물 50%, 과일과 채소를 35~40%, 생선이나 육류 10%를 목표)를 강조했고 육류도 방목 계란 하나 정도나 생선 위주였다.

 

장 청소도 저녁 한 끼만 굶고 병실 내에서 간편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수차례 할 수 있었고 유산균도 동경대 약대에서 세계적 유산균 학자가 개발한 독한 혐기성 환경에서도 5년간이나 죽지 않는 녹농균까지 죽이는 강한 유산균까지 일본에서 구하여 복용 시켰다.

 

88가지의 항암효능 성분(버섯, 통곡류, 해조류, 쌀눈 추출물들로 구성된 유기농 생식)들이 함유된 산삼 생식을 장내 생태계 개선에 특효라며 복용시켰고 장내 세균 생태계가 개선되면, 면역력이 70%, 세로토닌이 90%, 멜라토닌이 90% 장에서 분비되어 불면증과 우울증은 물론 내가 3~년 동안 고생했던 갱년기 증세들이 사라지고 면역력이 올라갈 것이라고 단언하며 장 청소를 시키고 장내 유익균이 좋아하는 독일제 미네랄과 섬유질 그리고 천연 비타민을 복용케 하였다.

 

나는 남편 주장의 배후가 세계적 의학계 석학들의 이론에 근거했음을 알았기에 열심히 순종하였고 그 결과는 가히 기적과도 같았다. 지상파 방송의 일요특선 ‘장 건강의 중요성’ 프로그램에서 우리 집까지 와서 나와 남편을 방영하였다.

 

나 노화된 수용성 커큐민을 하루 3회 입안에서 머금어 천천히 삼키는 방법으로 입안과 목구멍 그리고 위와 장 등에서 점막을 통하여 흡수되도록 시도하였다. 또한 피부를 통한 방법으로 반신욕조에 풀어서 피부 속 흡수 등 많은 시도를 끊임없이 하였다. 커큐민의 항암 효능은 수많은 치유 결과들이 증명하고 있어서 남편은 암관련 인터넷 홈페이지에 ‘완치 in TALK’ 코너에 특별기고를 하였다.

 

숙면을 위한 침구류와 수면 안대 그리고 천연 수면 촉진 멜라토닌 생성 제품 복부 발열 벨트 착용

병실에서 매일 먹던 수면제 한주먹을 끊자는 남편의 제안에 나는 설마 하며 하루에 반일 씩 약을 줄여보았다. 몇 주 안 되어 나는 약 하나 없이 숙면으로 가는 기적 같은 치유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로토닌은 기분을 좋게 하고 면역력 회복에도 큰 역할을 한다더니 정말 그러했다.

 

신경정신과 의사와 4년여간을 상의하며 수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심화되기만 했던 우울증과 불면증 등 갱년기 증상들이 불과 4~5개월 사이에 기적처럼 사라졌다. 항암 후 피검사에서 나오는 종양표지자 수치(ca125)가 300대에서 정상 수치인 35이하에서 훨씬 양호한 10이하로 급격히 떨어졌다.

 

남편은 어린아이같이 주치의가 반대하는데 자꾸 이것저것 먹는 것을 두려워했던 나에게 이렇게 설득을 했다.

“여보! 병원에서 특히 항암 시 모든 약이나 식품을 금지하는 이유는 간, 신장 기능에 무리가 가서 항암제의 독성을 해독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야. 내가 알아본 제품들은 논문에 항암 독성을 제거, 완화시켜주며 면역력은 올려주는 천연성분들이고 실험에서 부작용이 보고되지 않았던 제품들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복용해요. 그리고 내가 하나 약속할게. 만약 내가 권하는 제품들을 복용하다가 정기 피검사에서 해독을 담당하는 간과 신장 검사 수치가 5개가 있는데 그중 어느 하나 정상을 벗어나면 어떤 제품도 권하지 않을게요! “라고 제안했다.

 

나는 논리적인 설득이라고 생각했다. 설득에 넘어간 나는 남편의 추천 제품은 모두 복용했다. 그리고 피검사 때마다 간호사들에게 5개 수치가 정상에서 벗어난 항목이 있는지 물었다. 남편의 공언대로 항암 6차까지 항상 피검사에서 간, 신장 수치 5항목은 정상이었고 그뿐 아니라 모든 콜레스테롤 등 모든 항목들이 정상이라고 간호사들에게 칭찬까지 들었다. 치유 결과도 놀라웠다. 깊은 잠을 약 없이 자게 되었으며 우울증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월간암(癌) 2022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