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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에 안긴 선경비(善敬碑)
천왕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조그만 비각을 만나게 된다. 비각 안에는 지붕
돌을
얹힌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이 비는 옥천
사에 시주를 많이 한 어느 사대부를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贈
戶曹
判書 安公
善敬碑'라 쓰여 있어 나중에 호조판서로 추증(
追贈)된 안씨 성을 가진 사대부가
비석의 주인
임을
알 수 있는데,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22년
이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그렇
다고 선경비를 위해 세워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자리는 원래 제왕의 수복(壽福)을 빌던 축성
전(祝聖殿)이 있던 곳이라 그 앞은 무조건 말에
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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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각(梵鍾閣) |
전나무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연병장처럼
넓은 자방루 뜨락이 펼쳐진다. 뜨락 왼쪽에는
범종각이 자리해 있는데, 범종(梵鍾)과 법고(法
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범종 같은 경우는 1776년에 주조
된 대종(大鐘)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장각에 있
으며,
1987년 재일교포 박명호가 시주하여 만든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박명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당
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거금을 시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물 외에도 조선 때 싸리나무로 만든
큰 구시가 있는데, 이것은 큰 불사나 법회 때
밥이나 물을 담던 커다란 나무 통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 연화산에 안긴 고성 제일의 고찰, 옥천사(玉泉寺) - 경남
지방기념물 140호
고성 제일의 명산(名山)인 연화산(蓮花山) 북쪽 자락에 고성 사찰의 갑(甲)인 옥천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676년(문무왕 15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10년에 걸친 당나
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670년에 귀국하여 화엄종(華嚴宗)을 널리 알리고자 영주 부석사(浮石寺)
를 시작으로 좁아 터진 신라(新羅) 땅에 10개의 화엄종 사찰을 지었는데, 옥천사는 그중의 하나
로 세워졌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지금도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옥천(玉泉)이란 샘에서 유래되
었다고 하며, 과연 의상이 창건했는지는 속시원히 입증할 수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이 하동
쌍계사(雙磎寺)에 남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47호)에 '쌍계사는 본래 절
이름을 옥천사라 했으나 근처에 옥천사란 절이 있어 헌강왕(憲康王)이 쌍계사라
제액(題額)을
내렸다'는 문구가 있어 옥천사가 그 이전부터 숨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말기인 898년에는 창원 봉림사(鳳林寺)를 세운 진경국사(眞鏡國師) 심희(審希)가 낭림선사
(朗林禪師)와 함께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크게 가람이 확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964년(광종 15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혼응(混應)과 더불어 3번째 중창을 벌였고,
1110년(예종 5년) 혜은(慧隱)이 쇠퇴한 절을 다시 일으키니 이것이 4번째 중창이다. 그리고 예
종 시절에는 묘응(妙應)이 이곳에서 천태종(天台宗)을 강의했다고 한다. 1237년 최씨정권이 대
장경(大藏經) 불사를 위해 진주에 대장도감 분사(大藏都監 分司)를 두었는데, 옥천사 보융대사(
普融大師)가 일연대사(一然大師)와 함께 팔만대장경 교정 작업을 벌였으며, 그 공로로 5번째 중
창이 이루어졌다. 1371년(공민왕 20년) 지운(智雲)과 원오(圓悟)가 6번째 중창을 했다.
1392년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옥천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천사 승려들은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왜군(倭軍)과 싸웠으나 1597
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의 공격으로 절 전체가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1640년 학명(學明)이 절 아래 대둔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
타나 웅장한 절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학명은 이튿날 꿈
속에서 갔던 그
곳을 더듬어 찾으니 글쎄 그때 본 거대한 절터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리도
일품이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의오(義悟)와 함께 중창불사를 벌이기로 하고 1644년에 우선
동상당(東上堂)이란 초가를 짓고 이듬해 심검당을 세웠다. 허나 재정이 넉넉치 못해 1654년에
겨우 법당을 지었고, 1664년에 정문을 세워 7번째 중창을 마무리 지었다.
1677년 묘욱(妙旭)이 법화회(法華會)를 개설하여 향적전, 만월당을 짓고, 1680년 인근에 청련암
(靑蓮庵)과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를 세웠다. 1764년에는 자방루를 짓고 그 앞에 뜨락을 넓
게 닦았는데, 여기서 승병 훈련을 했다. 조선 정부는 승군(僧軍)을 부리고자 바다와 가까운 절
에 의무적으로 승병을 두게 했는데, 영조 시절 옥천사 승군은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절 규모는 요사 5동, 산내암자 7개였으며,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을 정도로 크게 흥했다.
이때가 8차 중창이었다.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1800년(정조 24년) 나라에 종이를 바치는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로 선정되었다. 병역과 각가지 부역(負役)도 힘든데 거기에 종이까지 만들어야 되니
그 부담이 실로 상당했을 것이라 심한 부역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자꾸 도망을 치면서 절이
크게 기울게 된다. 그래서 1842년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주었으나 여전히 감당이 되지 않아 1880년에는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고 한다.
1863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신관호(申觀浩)가 절을 방문해 '연화옥천(蓮花玉泉)'
이란 글을 남겼는데, 이때 주지인 농성(聾醒)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빼줄 것을 호소했다.
그
말이 옳다 여긴 신관호는 바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종이 부역에서 해방되었다.
옥천사는 19세기에 진주와 고성 지역 사대부(士大夫)와 여러 관청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지배층과 관(官)과 한통속이라 백성들은 생각을 했던 듯 싶다. 백성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온갖 수탈로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옥천사는 종이 부역과 승병 군역이 있을 뿐,
그런데로 지원을 받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62년 진주민란(晉州民亂)이 터지자 농
민들은 절로 몰려와 경내 외곽의 건물과 대종을 파괴했으며, 1888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농민들이 다시 몰려가 많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뚜껑이 열린 용운대사(龍雲大師)가
정면으로 나서
'이 절에는 전하(殿下)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소. 더 이상 불을 지르면 당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것이오!!' 호통을 치니 이에 간이 쫄깃해진 농민들은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
다. 그 덕분에 대웅전, 자방루는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어쨌든 사대부와 관의 지원으로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했고, 힘들다고 도망친 승려를 소환하면
서 예전의 명성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조정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보내 왕실
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경상도관찰사이자 진주목사인 박규희(朴珪熙)가
개인
자금을 털어 옥천사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건물을 지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흐뭇해하며
축성전이란 사액을 내렸으며,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을 끊임없이 중건하면서 이른바 9번째 중
창은 마무리되었다.
이 당시 옥천사 소유 전답은 800여 마지기로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小作)을 주어 5:5 비율로 받
아 매년 1,000석의 수입을 챙겼다. 또한 산을 개간해 560정보를 전답으로 만들었으며, 세곡 수
입을 바탕으로 계속 전답을 불렸고, 승려 수도 나날이 늘어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11년 왜정(倭政)이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고 전국 31본산(本山)을 정할 때 옥천사가 그 하
나로 지목되었다. 허나 당시 주지인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
석하여, 대본산 지정을 거절했다. 그로 인해 옥천사 승려들의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1920년
경에는 진주에 포교당을 만들어 연화사(蓮花寺)라 하였다.
옥천사는 왜국으로 승려 15명을 유학보내기도 했으며, 이들은 장차 절 주지와 교육계로 진출했
다. 그리고
잠시나마 옥천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 나라의
독립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절은 통도사의 말사(末寺)이지만 워낙 파워가 대단하여 통도사
에서 주지를 파견하지도 못했다.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주지를 선출하여 통도사에 승인을
요구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1950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사찰답 800여 지기가 소작인들에게 죄다 넘어갔다. 그
로 인해 절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운영에 큰 위기를 맞았다. 다른 절은 약간의 불량답(佛糧畓)
이라도 건졌으나 옥천사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허나 연화산 주변 565ha의 산림을
가지고 있어 빈털털이는 그나마 면했다.
근래에 이르러 청담(淸潭)이 불교정화와 신도 교화운동을 벌이면서 전답을 잃어 방황하던 절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렸으며, 1984년 일주문을, 1987년 사적비, 1999년 유물전시관과 축성전을
지
으면서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경내에는 대웅전과 팔상전, 자방루, 조사전, 유물전시관 등 20동에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청련암과 백련암, 연대암 등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외에 고성읍내와 하동에 보광
사, 낙서암 등의 포교원을 운영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495호로 지정된 청동금고(靑銅金鼓)와 보물 1693호인 지장보살도 및 시
왕도 등 국가지정문화재 2점과 대웅전과 자방루, 향로, 대종, 명부전 등 지방문화재 7점을 간직
하여 고색의 짙은 향기와 절의 장대한 역사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또한 절 전체는 경남 지방기
념물 140호로 지정되었다.
옥천사는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연화산의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으며,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울창해 경남 남부의 경승지로 명성이 높다. 특히 알록달록 물감이 완연히 번진
가을은 그 백미이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혀있어 고요하기 그지없으며 풍경소리와 산바람 소리,
산새의 지저귐, 범종 소리가 그 고요를 가끔 깨뜨리는 게 전부이다.
절을 품은 연화산은 복분자딸기와 송이버섯이 유명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이다. 연화
산 일대는 경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화8경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다.
※ 연화산 옥천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① 고성, 배둔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성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과 마산남부터미널에서 배둔 경유 고성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② 진주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진주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대전동부터미널, 부산서부터미널,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이용
③ 고성/배둔/진주에서 옥천사3거리까지 (옥천사3거리에서 도보 35분)
* 고성터미널과 배둔에서 개천행 군내/완행버스(1일 10여 회)를 타고 옥천사3거리 하차
* 진주시외터미널에서 옥천사3거리 경유 배둔, 고성 방면 완행버스가 1일 11회 다닌다.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진입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연화산나들목을 나와 우회전 → 영오 → 개천 → 옥천사3거리 → 옥천
사 주차장
★ 옥천사 관람정보 (2013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300원 / 학생,군인 1,000원 (20인 이상 단체 800원) / 어린이 700원 (단체
600원)
* 옥천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최대 3박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체험형은 매월 2,4주 주말에 1박 2일로 진행된다. 체험형 참가비는 성인 5만
원, 초중고 4만원이며, 세면도구와 수건, 운동화 등을 지참해야 된다.
자세한 문의는 옥천사 종무소(☎ 055-672-0100)나 홈페이지 참조
* 옥천사에서 연화산 정상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 소재지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연화산1로 471-9) <☎ 055-672-0100>
* 옥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