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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 투병기

암을 이긴 사람들/스물여섯 전공의의 유압암 극복기

라이프케어 김동우 2014. 11. 15. 15:01

 

암중모색 암을 이긴 사람들의 비밀


 

 

 

 

웃는 미소가 퍽 얌전했다. 하얀 피부에 쌍꺼풀 없이 큰 눈, 단아한 살구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그냥 평범한 또래의 청순해 보이는 여성과 다름없었다. 어디에서도 만 2년 전 힘든 항암치료와, 수술, 방사선 치료를 받았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박경희씨는 현재 전문의 시험을 앞둔 4년 차 알레르기내과 의사이자, 3년 전 유방암 진단 후 수술을 받고 완치를 기다리는 3년 차 생존자다. 완치 판정이라는 영예를 얻기 위해서는 치료를 마친 후 5년이 지나야 해서 아직도 6개월에 한 번씩은 검사를 받는다. 내과 레지던트 1년 차, 20대 중반의 나이에 그녀는 암세포가 겨드랑이 림프절까지 전이됐다는 유방암 3기를 진단받았다. 유방암 중에서도 예후가 좋지 않은 편인 삼중음성유방암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의사에서 환자가 되었다

 

“상상도 못했어요. 가족력도 없었고, 술은 체질적으로 못 먹고 담배도 못 피워요. 흔히 유방암의 원인이라고 하는 빠른 초경이나 늦은 폐경, 경구용 피임제 등도 제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였죠.”

 

햇병아리 신입 레지던트의 일상은 그야말로 숨 돌릴 틈도 없는 밤낮의 연속이다. 그래도 스물 여섯 살, 당직을 설 때면 48시간을 꼬박 깨어있는 일상 속에서도 젊음이 생동하던 나이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낼 무렵, 어느 날 아침 속옷을 입던 박 씨의 손에 처음으로 가슴의 멍울이 스쳤다. ‘몰캉!’ 딱딱하거나 아프지는 않았으나, 움직임이 느껴졌다. 왠지 예감이 나쁜 조짐이었다.

 

빛나는 20대에 날벼락처럼 다가온 암이었다. 이미 림프절까지 퍼져있어 바로 수술을 할 수도 없었다. 가슴을 보존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암세포를 줄인 후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이후 7개월 동안 8번의 항암치료를 끝내고, 수술 후 30번의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의대생 시절부터 하얀 가운을 입고 집보다 더 오래 생활해온 익숙한 병원. 그러나 의사가 아닌 환자로 그 곳을 만나자 어색하기만 했다.

 

 

모범환자로 지내겠다는 다짐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과 의사였다. 일반적인 암환자들보다는 충격도 덜하고 조금은 편안하게 자신의 병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젊디 젊은 나이, 원인도 모른 채 발병한 암이 당황스럽고 억울하고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슬펐고, 억울했고, 때로는 절망적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초기에 발견하지 못해 3기까지 암이 진행된 걸 알았을 때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불안하고 무섭고 두려웠죠. 힘든 치료를 모두 잘 받을 수 있을까? 부작용이 심하면 어떻게 하나… 등등. 그래서 처음 항암제 주사를 맞고 돌아오던 날 마음 속으로 목표를 세웠어요. 절대로 입원해야 하는 일은 없도록, 씩씩하게 견디자고요.”


그녀는 투병 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로 늘 불안했던 감정을 꼽았다. 항암치료 부작용, 민머리,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 방사선 치료 후 부작용까지 물론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건 없었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자존감의 상실과 남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괴리감이었다. 항암치료 전날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우울감도 심했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집 근처 백화점의 문화센터에 다니며 그림과 손뜨개질, 꽃꽂이 등을 배웠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취미들이었다. 요가도 배우고 산책도 꾸준히 했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여행도 다니고,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 동안 보고 싶었던 드라마와 영화들도 몰아 보며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멍하니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없도록, 집중할 만한 다른 일을 찾았다. 모범생이었던 학창시절처럼 그녀는 그렇게 ‘모범 환자'로 살았다.

 

이십대 유방암 환자의 삶이란…

 

씩씩하자고 다짐했지만, 항암제 부작용이 그녀에게만 예외일 리 없었다. 구토감, 탈모, 무기력증, 몸 곳곳이 헐어 진물이 나는 점막염까지 말로는 다 못할 불편함이 생겼다. 구토감은 약을 먹기보다는 뜨개질을 하는 등 다른 일에 집중하면서 참아냈다. 탈모는 빠지기 시작할 무렵 미용실을 찾아 남은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쓰고 다녔다. 무기력증은 그냥 그 순간을 잘 넘기기만 하자고, 곧 컨디션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막염도 최대한 조심하는데 집중했다.

 

부작용을 이겨내는 데는 투병을 시작하면서 썼던 일기가 많은 도움이 됐다. 처음 항암치료를 받고 나서 느꼈던 여러 생소하고 힘든 증상들을 기록해두었다가 다음 치료 후 읽어보았다. 곧 생길 부작용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었다.

 

항암치료 후 수술은 무리 없이 진행됐고 수술 후 한 쪽 가슴에는 긴 상처가 남았다. 그녀는 “상처가 생겼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았어요. 이 흔적을 흉터로 만들지, 무늬로 만들지는 제 몫이겠죠. 저는 무늬라 생각하고 많이 예뻐하고 관심 가져주자 생각했어요.”
결국 가슴을 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탈의실에서 옷도 갈아입고 수영장의 공공샤워실도 이용한다. 시선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숨길수록 더 상처가 된다는 걸 안다. 상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고, 흉터가 아닌 무늬였기에 그녀는 떳떳할 수 있었다.

 

공허한 위로보다는 지켜봐 주는 마음

 

투병 동안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늘 “어디가 아파요?”, “왜 아파요?”, “수술하면 낫는대요?” 등의 질문을 던졌다. 수백 번 반복한 대답, 그녀는 때론 사람들의 이런 질문과 관심이 오히려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젊어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내 입으로 내가 어디가 아프고, 그래서 얼마 정도 살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잖아요. ‘다 잘 될 거야’ 라는 격려도 공허한 위로죠. 젊은 암환자들에게는 그저 말없이 지켜봐 주는 마음이 더 힘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사소한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상처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들은 누구보다 가족들이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말로 하지 못한 애정을 문자 메시지로 자주 표현해 주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 고단백•고섬유질 식단부터 생필품까지 모두 유기농과 천연성분으로 준비해주었다.

 

사소한 짜증을 모두 받아주고, 치료로 힘든 일상에 활력소가 됐던 건 두 살 차이나는 남동생이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같이 TV만 보고 있어도 든든하고 믿음직해 힘이 됐었다. 그래서 그녀의 자녀 계획은 무조건 둘 이상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꼭 둘 이상은 낳겠다고 결심했다. 만약을 대비해 자신처럼 의지할 형제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남매의 우애 또한 그녀를 씩씩하게 한 버팀목이었다.

 

좋은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

 

20대 3기 유방암 환자의 5년 생존률은 50%다. 2명 중 1명은 살고, 1명은 죽는다는 얘기다. 아무리 사실이고 통계라지만, 20대 유방암 환자에게 50%의 확률은 잔인한 숫자다. 아직 5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무리 없이 지내고 있다.

투병 흔적이 오래 전 자취를 감춘 듯 보이는 그녀에게 이제는 괜찮지 않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띄며 아직도 가끔씩은 재발이 두렵다고 고백한다. 처음 복귀했을 때는 이 두려움 때문에 의사를 그만둘까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병원에서 암환자들을 만나면 투병 당시의 우울하고 힘든 기억이 떠올라서 더 힘들었다. 암이 재발하는 악몽을 꾸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를 다잡은 것은 더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과 다짐이었다. 자신이 1년간 투병하며 느꼈던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가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이를 아는 경희 씨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최종 전공으로 알레르기 내과를 선택했다. 암만큼 중병도 없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질병도 없지만, 자신의 진료가 환자들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어서 무척 만족스럽다고 전했다.

 

 

암환자도 나와 같은 ‘사람’일 뿐

 

힘들고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세월이 약이라지만, 힘든 기억은 잊을 수만 있으면 잊고 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터뷰는 박 씨에게 사실은 안 하고 싶은, 불편한 인터뷰였다.

 

“고민이 됐어요. 결혼도 하고 시간도 많이 지났는데, 더 이상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죠. 하지만 제 얘기로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고 환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암환자들도 다른 건강한 사람들처럼 일하고 운동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거든요. 암환자들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소중한 일상이 있는 그런 나와 같은 ‘사람’이란 걸 그저 편견 없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박 씨는 젊은 암환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더 당당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병을 숨기고 사회와 단절된 채 살다가 다시 나오는 일은, 처음부터 주변에 알리고 시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일이다. 스스로 나을 수 있다고 믿을 때, 또 이를 위해서 노력할 때, 주변의 관심과 사회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되면 암환자도 충분히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박 씨는 지난 해 결혼을 했고, 병원 일이 바빠 남편이 집안 일을 많이 도와준다며 웃었다. 신혼생활과 2세 계획을 얘기하며 맑은 미소를 짓는 그녀, 행복 바이러스가 나쁜 암세포도 모두 사라지게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