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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우스 막시무스

라이프케어 김동우 2020. 5. 22. 11:01

파비우스 막시무스

 

“순리대로 갑시다.”

“순리대로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암세포 때려 잡자고 독한 항암치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증상 완화에 초점을 맞출 겁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생기던 그것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입시다. 순리대로 갑시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파비우스가 살던 당시 로마는 큰 위기였다.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해왔다. 로마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대패를 하며 수도 로마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잇따른 큰 전투에서 많은 군대와 장군을 잃은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전쟁터로 내보냈다. ​

 

하지만,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직접적인 싸움을 피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식량공급을 차단시키는 작전만 펼쳤다. 한니발이 적극적인 전투를 걸어오면 도망다니고 지연시키는 지연전술로 적군의 소모를 기다렸다. 바다건너 카르타고로부터 식량과 전쟁 물자를 지급받을 수 없었던 한니발에게는 보급로가 취약점이었고 파비우스는 이점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파비우스는 지구전을 펼치며 한니발 군대가 스스로 지치기를 바랬다. ​

 

식량이 부족한 한니발 군대가 쓸고 지나간 자리는 피폐해졌고, 로마인들의 경제적 피해는 더욱 커졌다. 한니발이 원한 것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붕괴였다. 한니발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 내부를 휘젓고 다니며 로마 제국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한니발 편에 서지 않고, 로마 제국에 편에 서서 로마로 SOS를 보냈던 수많은 동맹 도시들은 한니발에게 당했고, 그것을 먼 발치에서 로마군대가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한니발 군대가 떠나면 로마군대는 한니발에게 넘어갔던 도시를 다시 되찾아오고 도시를 다시 복원시켜 줄 뿐이었다. ​

 

정정당당한 맞대결을 원하고 후퇴를 굴욕이라 여겼던 로마인의 전통에서 파비우스는 굼뜬 사내라고 불리우며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에 불만을 품은 강경파는 파비우스를 실각시켰다. 강경파가 정권을 잡자, 그들은 다시 한니발과의 정면승부를 택한다. 그 전투가 유명한 칸나이 전투이고,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7만 군사가 몰살당하며 한니발에게 다시 대패한다.

 

로마군이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하자 파비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뽑혔고, 로마는 한니발과 맞서 싸우지 않고 싸움을 지연시키고 소모전을 통하여 한니발이 지치도록 기다렸다. 그 이후 로마는 10년 넘게 버티며 한니발이 지치도록 기다린다.

 

이길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에는 무모해서는 안된다.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이길수 없다면 지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지지 않으며 버티는 버티기 전략은 비굴해 보여도 때로는 유용하다. 존버 정신으로 버티다 보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암세포는 굉장히 영리하다. 암세포는 노화와 진화를 거듭한 생존 기계이다. 영생을 위해 스스로 유전자를 바꾸며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최적화 되어있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는 주변 조직도 스스럼없이 파괴하고 이동하며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영악하게 탈바꿈한다.

 

나는 살아온 지 40년 조금 넘었고, 인류는 존재한지 20만년 정도 되었지만, 암세포는 지구상에 존재해온지 수 억년은 되었을 것이다. 항암치료로 손쉽게 없엘 수 있는 암도 있지만, 무슨 수를 써도 없엘 수 있는 암도 있다. 암세포는 우리보다 영리하고 우리는 모든 암을 이길 수 없다. 노화를 이길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모든 암을 다 이길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것일까.

 

이길수 없는 상대를 만나서 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그중 중요한 것은 냉정한 현실 파악이다. 파비우스가 지구전 전략을 택한 데에는 한니발에 대한 정확한 파악, 로마 장군들의 역량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뒷받침되었다. 로마 장군들의 개별 역량으로는 절대 한니발을 이길수 없다는 사실을 파비우스는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자기부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며, 스스로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

 

파비우스가 깨달은 것은 로마 장군들의 모자람만은 아니었다. 한니발 군대에 식량 보급이 치명적 약점이라는 점도, 한니발은 매우 특출나지만 한니발 이외의 카르타고 장군들은 별 볼일 없다는 점도 파비우스는 깨달았다. 로마에 뛰어난 장군은 없어도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니 만치 식량과 군수물자 보급은 문제없다는 장점도 깨달았다.

 

파비우스가 지구전을 펼치며 마냥 도망다니며 한니발과의 정면승부를 피한 것만은 아니었다. 파비우스는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했다. 카르타고 본국의 정보와 한니발 군대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며 상황을 재평가했다. 한니발의 다음 행로를 예측하며 때로는 한니발 군대보다 한발짝 먼저 가서 기다리도 하였다.

 

한니발과의 정면승부만 피했을 뿐 한니발이 없을 때에는 소소한 전투도 벌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정적으로 보여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맥시멈으로 기다리며 버티며 한니발이 지칠 때까지10년을 끌었고, 오랜 기다림은 2차포에니 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가져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도 때로는 이런 전략을 택한다. 암세포가 싸움을 걸어오더라도 절대 응하지 말고, 최대한 비굴하게 시간을 끌며 버티는 일. 암이 커지거나 말거나 시간을 끌며 기본적인 기능이 유지되도록 하는 일. 그저 숨쉴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아프지 않게 만드는 일. 이런 일을 하며 정면승부를 피하고 버텨본다.

 

암 덩어리가 식도를 막으면 위식도가 막히면 PEG라는 위루술을 해서 위장으로 직접 영양을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들고, 암덩어리가 숨길을 막으면 기도절제술을 해서 숨길을 트여 놓고, 암덩어리가 통증을 일으키면 진통제를 아낌없이 쓴다. 균감염이 생기면 항생제를 적절히 사용한다. 그러면 온전치는 못해도 먹을 수 있고, 숨쉴 수 있고, 아프지 않게 할 수는 있다.

 

암이 자라거나 말거나 환자는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예정된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에 이 작전도 언젠가는 무력해지겠지만, 적어도 독한 항암치료로 힘든 것은 피할 수 있고, 나름대로 삶의 질도 유지할 수 있다. 버티면서 시간을 벌 수 있다. 벌어들인 시간으로 다른 유용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수도 있다.

이런 버티기 전략은 배울 수 있는 스승이 별로 없다. 이런 전략은 아주 오랜 시간 아주 많은 환자를 보며 아주 많은 실패를 겪으며 날 선 칼날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소위 명의니 대가니 하는 사람들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환자가 굉장히 큰 이득을 보는 것을 터득하게 되지만, 후배들에게 잘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비굴해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의료의 행위별 수가제도는 무언가를 해야만 경제적 보상을 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저널도 무언가를 해야만 논문을 실어준다. 무언가를 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있어도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승리에 환호하지만, 지지 않음에는 환호하지 않는다. 결과가 예정된 죽음일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사람들은 내 비굴한 작전을 이해하진 못한다. 치료 안 해준다고 불만을 쏟아낸다. 환자를 빨리 포기하는 것 아니냐며 욕도 많이 먹는다. 암이 커지거나 말거나 최대한 증상을 완화하며 시간을 버는, 완화의료라고 불리우는 이 전략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최신 표적항암제가 두 달의 시간을 벌어들일 때 미친듯이 열광하지만 완화의료로 두 달의 시간을 버는 것에는 놀랍도록 냉담하다. ​

 

하지만, 그것이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판단하면 냉담함과 비굴함, 비난 따위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지지 않는 것도 패배는 아니다.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못지않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것이 순리 아닐까.

 

[출처] 파비우스 막시무스|작성자 bhums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