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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 투병기

암환자 의료비 지원 대상(서영주)

라이프케어 김동우 2010. 10. 3. 16:58

 


 

 

 

제목 암환자의료비지원 대상(서영주)
공모명
공모자 서영주 시상내역 대상

암환자의료비지원부문 대상

 

전 지금 너무나 행복합니다. 돈이 많으냐고요? 좋은 집안과 결혼했느냐고요?

아니요. 제 옆에 아들 도훈이가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고 있는 도훈이를 보면 가슴이 터질 듯 행복합니다. 주위의 모든 이들은 평범하게 누리는 것들이겠지만, 저에겐 큰 아픔을 이겨내고서야 찾아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순간 순간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행복함을 저의 작은 글로써 다른 이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 저의 나이는 스물아홉입니다. 며칠 있으면 결혼 5주년을 맞이하게 되네요.

좀 이른 나이에 결혼한 저는, 가족이라는 행복을 채 느껴보지 못하고 큰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결혼한 해에 아이를 가졌고,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2004년 5월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날, 8개월 된 아들 도훈이와 처음으로 산책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감기기운이 있어 소아과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3일 후에는 응급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감기인 줄 알았습니다. 3일 입원치료만 하면 될 꺼라 했는데, 그 후 열이 내리지 않아 컴퓨터 단층촬영을 해야만 했고, 대학병원으로 옮기란 말을 담당과장님께 들었습니다.

 

 그래도 별일 아닐 것이라고 기도하며, 그 날 찍은 사진을 갖고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응급실에 가자마자 너무나 무서운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어머님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 말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도 소름이 끼쳐 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여러 검사결과 끝에 이름도 생소한 ‘신경모세포종’이라는 소아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 때 그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가슴이 너무나 아파 제 손으로 가슴을 쳐야지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진일 거라고, 의사선생님 뒤를 따라가며 복도에 주저앉아 목 놓아 소리 질렀습니다. 갓 돌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 몸에 암 덩어리가 있다니, 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만 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한참 후에서야 신께 감사했습니다. ‘불치병이 아니라 난치병이라는 것을…….’


 곧 항암치료를 시작하며 우리 모자의 병원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걱정과는 달리 우리 도훈이는 항암치료를 너무나 잘 이겨줬습니다. 다섯 번의 항암치료를 마친 후 우린 종양절제수술을 위해 서울의 한 병원에 갔고, 다행히 수술은 잘 되어 이내 대구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내려온 다음날부터 더 강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해야만 했습니다.

 

 치료 후 우리 도훈이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면역력이 약해져 갖가지 감염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에는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한 달 가량 수없이 많은 피를 토하고 혈변을 보며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고비였습니다. 수혈에도 한계를 느낀 교수님께서 급처방을 하셨습니다. 지혈이 되지 않아 혈우병에 쓰이는 약이 있다며 처방을 하셨습니다.

 

 시간을 다투며 서울에서 제약회사 직원이 직접 약을 가지고 오는 대로 주사를 맞았습니다. 이 약은 비보험이라 작은 주사기 한 대에 약 300만 원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도훈이를 살려야 했기에 8시간 간격으로 이틀을 맞았습니다. 지혈이 될 때까지 맞아야 된다고 하셨지만, 효과는 기대 이하였고, 며칠 후 병원비 독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제 눈앞에서 제 자식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저에겐, 너무나 잔인했고 끔찍했습니다. 울 기운조차 없이, 나를 보며 자기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도훈이의 눈빛을 봤지만, 전 아이를 안아주는 것 외엔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 때 엄마인 제 심정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매순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도훈이를 껴안고 기도했습니다. ‘차라리 우리 도훈이 더 이상 고통주지 마시고 당신 뜻이 그러하다면 데리고 가 주십시오.’ 속으로 울부짖으며 통곡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약도 치료법도 없는 상황에서 전 서울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퇴원수속을 밟았는데 한 달 입원비가 2000만 원이 넘었습니다.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일단 퇴원은 해야겠기에 저의 모든 신용카드와 부모님의 신용카드까지 이용해서 결제를 했습니다.

 

 장담하기 힘들다는 주치의의 말을 뒤로하고 우린 서울을 향해 구급차를 탔습니다.

산소수치와 심장박동수가 고르지 못했지만 잘 견뎌 무사히 도착을 했고, 너무나 다행히 여러 의사선생님을 만나 몇 달이 지나서야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앙상한 뼈만 남은 우리 도훈이는 그 뒤에도 수차례의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그리고 조혈모세포이식 후 MIBG라는 새로운 방사선치료까지 너무나 힘든 치료를 받았습니다. 생과 사를 몇 번이고 오가며,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게 끝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 끝이어야 된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2006년 8월 큰 수술을 하기 위해, 또 한 번 중앙 수술실로 도훈이를 보내야만 했고, 다시 큰 고비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2004년 10월 종양제거 수술 후, 돌이 갓 지난 도훈이로서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방사선치료를 했었는데, 그 어리고 여린 몸에는 큰 무리였었나 봅니다. 그 후 엄청난 양의 구토를 늘 반복해야 했고, 물도 먹지 못한 채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모든 치료가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꺼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좋아지기는커녕 증세가 더 심해져, 검사를 한 결과 십이지장이 타서 오그라졌다고 하였습니다. 방사선치료로 인해 장기가 타버린 거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한 번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정말 어디까지 고통을 받아야만 끝나는 것일까?’ 이젠 정말 하늘도 원망스럽고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저 또한 오랜 병원생활에 지쳐있었던 터라 도훈이와 함께 죽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 후 소아외과 상담이 이루어졌고, 또 한 번 수술실로 보내져야만 했습니다.

처음 수술만큼 힘든 수술은 아니었지만, 수술실을 나가자며 우는 도훈이를 마취시키고 나온 저에겐 더욱 고통이었습니다. 다행히 담당 의사선생님께선 수술이 잘 됐다고 하셨습니다.


 치료시작 2년 6개월이라는 병원생활을 접고, 작년 가을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 우리 모자의 서울생활은 죽기보다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운영하는 쉼터라는 곳이 있긴 했지만, 도훈이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공동생활을 할 수 없어 따로 방을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비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한 달에 70만원이나 하는 원룸비는 저에겐 또 다른 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005년 보건복지부 정책으로 소아암 지원이 확대되었습니다. 종전엔 백혈병어린이에 지원이 되던 것이, 모든 소아암 어린이지원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에 전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보건소로, 보건복지부로 몇 번이고 확인 전화를 했습니다. 여러 채무관계에서 힘들어하고 있던 저에겐, 이루 말 할 수 없는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 해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아 병원비 전액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큰 돈 2000만원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니, 지금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마냥 행복한 시간이 오진 않았을 겁니다.


 늘 가슴 졸이며 생활했던 저에게 처음으로 내려온 집은 너무나 아늑하고 포근합니다. 우리 셋이서 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듭니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아기 도훈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예전엔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가슴이 벅찹니다. 하루하루가 감사한 마음으로 이 행복을 오래도록 지킬 겁니다.


 지금 투병중인 모든 환아 가족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죽고 싶을 만큼, 너무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만 바라보는 도훈이가 있어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힘든 시간이겠지만, 그 뒤에 찾아 올 행복을 준비하듯 모두들 힘내세요.” 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도훈이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도훈아, 지금 이 순간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구나. 네가 아팠던 시간들만큼 엄마는 자만하지 않고 가슴깊이 간직하며, 너에게 좋은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 우리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자꾸나. 사랑한다. 우리 아들…….”